Prologue. 자격지심의 공정

결핍이 나를 깎아 만든 시간

by JP 정표

나는 늘,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내 생의 첫 번째 식각(Etch) 공정은 중학교 3학년 여름에 시작되었다.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해였다.


지방 현장에서 건축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셨다.

며칠 뒤, 댐을 개방한다는 뉴스 속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셨다.

나는 마지막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죽음은 슬픔보다 현실로 먼저 다가왔다.

아버지의 사업에는 빚이 많았고,

우리는 아파트를 팔아 빚을 정리한 뒤

도망치듯 반지하 월세방으로 숨어들었다.


어머니는 외삼촌들의 도움으로 작은 치킨 가게를 여셨고,

누나는 교복을 벗자마자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기억은 ‘치열한 공부’가 아니었다.

안경테가 부러졌는데 새로 맞출 형편이 안 되던 달,
테이프를 감고 다녔던 부끄러움.

수능 전날에도 불안을 잊으려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던 그 무력감.


평일엔 버티듯 공부했고,

주말엔 현실이 버거워 책상 앞에 오래 앉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곰팡이처럼 ‘자격지심’이 피어올랐다.

나는 왜 남들처럼 평범할 수 없을까.

왜 나는 늘 마이너스에서 시작해야 할까.


그때는 몰랐다.

그 결핍과 가난, 그리고 열등감이 나를 깎아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깎여나감(Etching)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패턴을 새기고 있었다는 것을.


반도체 엔지니어가 된 지금, 나는 웨이퍼를 깎는 업무를 한다.

식각(Etch) 공정의 정의는 명확하다.


"불필요한 막질을 제거하여,

원하는 회로의 패턴을 선명하게 남기는 기술."


내 인생 또한 그랬다.

결핍은 나를 지우지 않았고,

대신 불필요한 욕망과 비교심을 걷어냈다.


한남동 단국대의 가파른 언덕길에서,

관악산 자락 서울대 연구실의 쪽잠 속에서,

캘리포니아 플레전턴의 작은 집에서,

벨기에 imec 타워의 오피스에서


나는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깎아냈다.


2011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에 입사했다.


2020년, 코로나 시절에 스탠퍼드 방문연구원으로

미국 플레전턴에서 머무르며

가족과 함께 봉쇄된 시간을 견디고

멈춤의 의미를 배웠다.


2023년부터 2025년까지는 벨기에 imec에 파견되어,

기술보다 사람이 먼저인 연구의 온도를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현업으로 복귀해

차세대 패키징 연구 업무를 진행 중이다.


새로운 공정, 새로운 과제.

그러나 본질은 같다 —

불필요한 층을 지우고,

진짜 필요한 패턴만 남기는 일.


테이프 감은 안경을 쓰던 사춘기 소년은

이제 두 딸의 아버지가 되어 100세 시대의 삶을 설계하고 있다.


이 글은 성공한 엔지니어의 자랑이 아니다.

원하지 않는 시련에 깎여나가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자신만의 회로를 새겨온

한 사람의 공정 기록(Process Log)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결핍 때문에,

혹은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움츠러든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망가지는 중이 아니다.

가장 선명한 ‘당신만의 패턴’을 남기기 위해,

지금 거칠게 식각 되고 있는 중이라고.


Etch the Life.

이제 그 치열하고도 뜨거웠던 공정의 기록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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