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키친] “아빠, 나가.”

[사이드밀] 사춘기 앞에서 배운 ‘덜 하기’의 기술

by JP 정표

“아빠, 나가.”


닫히는 방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요즘 저는 ‘사랑’에도 타이밍이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반도체를 제작하는 클린룸에서는 아주 작은 먼지 하나,
‘파티클(Particle)’도 공정의 치명적인 오염원(Contaminant)이 됩니다.


그 먼지가 본래 나빠서가 아닙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의 공정에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도를 지키기 위해,

더 하지 않고 불필요한 개입을 줄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부가 가장 안전하게 단단해지는 ‘숙성’의 시간입니다.


딸아이 방 문 앞에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 사랑과 관심도 아이에게는
미세한 먼지 같은 ‘파티클(티끌)’이 될 수 있겠다고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던진 말들,
가르치고 싶어 덧붙인 조언들이
실은 아이의 마음이라는 클린룸에 서성이는
불필요한 간섭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기를 구울 때도 불에서 내려
잠시 기다려주는 ‘레스팅(Resting)’이 있어야
육즙이 고루 퍼집니다.


돌이켜보면 관계에도 열기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타이밍을 놓친 사랑은 정성보다 먼저 부담이 되기도 하니까요.



아이의 눈빛이 흐려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멈췄어야 했습니다.


그 찰나가 공정을 종료해야 할
엔드포인트(Endpoint)였다는 것을,
저는 닫힌 문 앞에서야 뒤늦게 알았습니다.


지난 주말 아침, 저는 첫째 아이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용히 랩탑을 켰습니다.


무언가를 ‘더’ 하는 아빠보다,
불필요한 개입을 ‘덜’ 하는 어른이 되는 연습을
조심스럽게 시작해 보았습니다.


사랑은 종종 말을 줄일수록 선명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체온,
재촉하지 않아도 자라는 시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망가지지 않고 지켜지는 순간들...




혹시 여러분도,
“더”보다 “덜”이 필요했던 순간이 있으셨나요?


— JP 정표 | Etch th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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