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얼룩

다 끝난 줄 알았는데도 마음에 남아 내일을 흐리게 하는 말들에 대하여

by JP 정표


유난히 대화가 많았던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우면,
사방이 조용해진 틈을 타서
낮에 들었던 말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분명 그 자리에서는
다 풀고 웃으며 헤어졌는데,
왜 어떤 문장은
마음의 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걸까요.


아까 그 표정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 말 뒤에 숨겨진 의도가 있었나.


이미 상황은 끝났고,
상대는 잊었을지도 모를 말들인데
잔상은 밤새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깨끗이 씻어냈다고 생각했는데도,
끈적하게 남아
내일의 기분까지 건드리는 이 찌꺼기들.


저는 요즘
그런 흔적을
삶에 남는 레지듀라고 부르곤 합니다.




오늘의 전시 작품


작품명: 기억의 얼룩 (Stains of Memory)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으로 그려진 4x5 비율의 유화.
청명한 푸른 하늘 위로 햇살이 비치고 있지만,
화면 곳곳에는 씻기지 않은 검은 구름 같은 얼룩들이 남아 있습니다.


맑은 배경과 대비되는 이 흔적들은
지나간 일의 잔상과
쉽게 떨어지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

표지12.png 기억의 얼룩 (Stains of Memory)


[도슨트 JP의 한마디]


우리는 종종
아픈 기억도, 부끄러운 실수도
아무 흔적 없이 지워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날의 말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밝은 오늘의 하늘 위에도
작은 얼룩처럼 남아 있곤 합니다.


이 그림은 제게
바로 그런 잔상의 표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도체 공정에서는
회로를 만들기 위해 감광액(PR)을 바르고,
식각을 마친 뒤에는
그 역할을 다한 막을 벗겨내는 공정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가끔,

완벽하게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주 미세한 잔여물이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레지듀(Residue), 잔여물입니다.


레지듀는 작고 미미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얇은 찌꺼기 하나가 남아 있으면
다음 층을 쌓을 때 제대로 붙지 않거나,
엉뚱한 곳을 연결해 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엔지니어들은
“다 지웠다”는 감각을 쉽게 믿지 못합니다.
구석구석을 다시 보고,
한 번 더 확인합니다.


큰일을 막는 건
늘 마지막에 남은 한 점이니까요.




삶에서 생기는 말의 잔상도
어쩌면 비슷합니다.


대화가 끝났는데도
어떤 문장이 마음 바닥에 눌어붙어
다음 날의 표정까지 흐리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게 오해인지,
내 예민함인지,
혹은 단순히 피곤해서인지
정확히 모르겠는데도요.


예전의 저는
그 레지듀를 빨리 없애고 싶었습니다.
더 설명하거나,
더 따져 묻거나,
혹은 “별일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덮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하게 닦아낼수록
더 번지는 잔상도 있더군요.


그래서 요즘은
지우기보다
헹구는 쪽에 가까운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의 하루였을지도 몰라.
내 가치가
그 문장 하나로 결정되는 건 아니야.
진심이 다 전달되지 않았어도,
오늘은 여기까지여도 괜찮아.


이건 정답이라기보다
내 마음을 다음 하루로 넘기기 위한
작은 세정 같은 느낌입니다.


아주 강한 약품이 아니라,
조금 더 따뜻한 물로요.





오늘 하루,
당신의 마음 벽에
유난히 끈질기게 붙어 있는 말이 있나요.


그게 레지듀가 되어
내일의 당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지금 당장 완벽히 지우진 못해도
한 번만 조용히 헹궈봐도 좋겠습니다.


그 말이 남긴 잔상이
당신의 하늘을 전부 가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 JP 정표 | 결함의 미술관


수요일 연재
이전 10화말의 두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