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평 _ 살인마 잭의 집, 2018

인간의 본질은 빛인가, 지옥인가

by 훈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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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무엇인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그 경계는 판단하기에 모호하다. 한 시대 혹은 사회에서 외설이라고 여겨지고 비판 받던 작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예 술로서 인정을 받기도 한다. 라스 폰 트리에의 신작, ‘살인마 잭의 집’은 그 경계를 두드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칸느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던 관중들의 일부는, 작품의 의도나 메시지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리를 박찬 뒤 상영관을 떠났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어쩌면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들이야말로, 라스 폰 트리에가 그의 영화를 통해 던진 교묘한 메시지에 가장 이성적인 인간의 방식으로 답변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의 본 구조는, 강박증을 가진 사이코패스 잭이 자신의 생애 동안 저질렀던 연쇄 살인 중 5건 의 살인을 지옥의 인도자인 버지에게 설명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때 감독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는 크게 네 가지의 형식과 상징으로 이루어진다. 편집 기법, 음악, 단테, 그리고 건축. 이들은 서로 얽히며 영 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표현하는 매개체가 된다.


첫번째 언어는 편집 기법이다. 영상의 편집 기법, 또는 촬영 방식의 미미한 변화에 따라, 시청자 는 극 속의 상황이나 인물에 몰입하는 정도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러한 기법의 완 급을 조절함으로써, 시청자를 시험대에 올려 놓는다. 영화 초반부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형식은 불연속적인 컷 편집이다. 전혀 개연적이지 못한 순간에 이뤄지는 장면의 전환과 끊김은 청자로 하여금 영화 속에서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이러한 컷 편집은 줄어들게 되고, 살인마 잭의 시선에 따라 연속성을 띤 채 이동한다. 그리고 청자들은, 초반의 분리와 달리 후반으로 진행될수록 살 인마 잭과 같이 호흡하게 된다. 가장 마지막 상황에서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 잭에게 몰입한 당신은, 라스 폰 트리에의 의도에 걸려들어, 계획된 몰입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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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완급을 조절함으로써, 라스 폰 트리에는 작품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잭의 살인 행위에 대 한 공감 정도를 교묘하게 조정한다. 영화 초반부에서 잭의 행위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분리된 채,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시선들은, 어느새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잭과 함께 호흡한다.


컷 편집과 전환, 카메라의 흔들림이 온전히 멎는 순간은 잭이 풀 메탈 자켓탄을 발사하려는 시점 과, 그와 버지가 지옥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는 이 순간에, 청자들은 잭의 괴랄한 철 학과 감정 그리고 떨림에 공감하게 된다. 이성적 공감이 아닌, 감정적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직후에 도 달한 지옥에서 영화는 그 공감을 단죄한다. 조여오는 지옥의 소리와 불길 가득한 화면의 온도는, 라스 폰 트리에의 설계에 따라 잭의 살인과 감정에 공감한 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든다.


두번째 언어는 음악이다. 영화 전반부에 흐르는 음악은 글렌 굴드의 바흐 파르티타 2번 다 단조 작품 826(Partita No.2 in C minor, BWV 826)이다. 글렌 굴드는 주인공 잭과 유사하게, 강박증과 정신질환 을 가졌던 예술가이다. 잭의 살인 행위가 완성되어 갈 수록, 글렌 굴드의 피아노 선율 역시 완성되어간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자신의 살인 행위를 예술로 정의하는 잭의 궤변이 논리적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을 감 독은 묘사한다. 또한, 청자 역시 잭의 살인이 완성되어감을 느낀다. 이때 논리적 완성은 단순한 연결 구조 의 완성도일 뿐, 그 완성이 정의롭거나, 참이라는 것을 보장하지 못함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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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자면, 잭은 그저 사이코패스 살인마일 뿐이다. 그러나, 점차 완성되어가는 그의 논증, 그리고 완성되어가는 글렌 굴드의 선율을 통해 청자들은 잠재 의식 속에서 잭의 살인이 예술과 같이 완성 되어감을 느끼게 된다. 아마 영화가 끝난 뒤에, 청자들의 머리 속에 남아 울리는 소리는, 글렌 굴드의 피아노 선율과 지옥의 잔혹한 비명소리일 것이다.


세번째 언어는 단테의 신곡이다. 작품 전반에 걸쳐, 잭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예술로 논증하는 동 안, 라스 폰 트리에는 단테의 ‘신곡’을 차용한 상징들을 통해 인간 본질에 대한 작품의 테제를 드러낸다.


이러한 단서는 잭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버지의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버지(Verge)의 이름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인도자 베르길리우스(Vergilius)에서 차용하였는데, 단테의 신곡 역시 연 옥, 지옥, 천국에 이르는 죽음의 여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영혼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내용으로 구성되 어 있다.


이때 단테는, 지옥과 연옥을 지나며 인간의 원죄에 대해 탐구한다. 이때 인간 본성과 존재에 대한 고대 플라톤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될 수 있다. 이때 육체는, 쾌락과 욕구, 욕망을 따르는 경향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는 곧 파멸과 전쟁으로 이른다. 반면, 인간의 영혼은 밝은 이데 아의 세계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영혼은 진정한 진리와 선으로 향하는 경향성을 가진다. 결국 인간은 본 능을 추구하며 파멸로 향하는 육신과, 밝은 진리를 담은 이데아를 모두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다. 빛을 발 하고 있는 전구를 촬영한 뒤, 그 사진을 네거티브 편집하는 경우에, 그 중심에는 가장 짙은 어둠이 존재한 다. 라스 폰 트리에가 묘사하는 인간 역시 그러하다. 가장 밝은 빛과, 가장 짙은 어둠을 동시에 가진 존재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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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에서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진 거리를 한 남자가 걷는다. 가로등에 가까워질 수록 그림자는 작아지지만, 진해진다. 가로등에서 멀어질 수록, 그림자 는 옅어 지지만, 커진다. 결국 빛이 강할 수록 그림자 역시 응축되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동굴 속 비유를 풍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빛의 세계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림자가 아닌 진리를 바 라보게 된다. 그러나 가장 밝은 빛 앞의 대상 아래에는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한다. 인간은 선과 진리 를 추구하지만, 그 이면에는 절대로 벗어낼 수 없는, 가장 어두운 인간 본연의 모습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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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언어는 건축이다. 잭의 살인이 진행됨과 동시에, 잭은 끊임없이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노 력한다. 제목 ‘살인마 잭의 집’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듯이 말이다. 영화상에서 잭이 짓는 건축의 양식은, 고 대 양식부터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결국 르 코르뷔지에의 양식으로 그의 건물을 완성한다. “건축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며, 고전과 현대의 일관된 건축의 본질은 정신과 진실의 문제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남긴 말이다. 이때, 잭이 공부한 고대 양식들은 르 코르뷔지에가 젊은 시절 감탄한 고대의 건축 양식들이다. 그 러나, 세계전쟁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빠르고 간단한 집을 공급하기 위해, 빛을 반사하고 신의 권위를 드러 내는 건축 양식을 파괴한 뒤 뼈대에 벽을 조립하여 효율적으로 지을 수 있는 돔이노 건축을 선보인다. 건 축에서 신과 빛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르 코르뷔지에를 대표로 하여 시작된 근대 건축은, 신의 빛과 진리를 표현하고 자 노력한 고대 건축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과 욕구를 중시한 건축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 정신은, 신에서 벗어나 인간의 편의와 욕망을 제일의 가치로 추구하는 근대, 현대 사회의 모습과 일맥상통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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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플라톤으로 돌아가 보자. 플라톤은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구분했다. 이때 육신은 욕구와 쾌락을 추구한다. 이는 역시 빛이 아닌 그림자이다. 이제 현대 사회를 다시 바라보자. 현대 자본주의 사회 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개념은, 개인주의와 효율성이다. 근대를 거쳐, 현대 사회의 인간은 더이상 신이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되려, 인간은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욕구 충족, 그리고 효율적 발전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자연, 약소국, 약자, 소수 집단 등 약자들은 도태되었고,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라는 논리 아래 정당화되었다.


잭의 논리를 바라보자. 잭은 양과 호랑이를 예로 들어,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살인을 정 당화한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를 논리로, 소수자의 도태와 파괴를 정당화한다. 살인에 대한 그럴싸한 논리 를 제공하는 잭과, ‘합리적’ 시스템 아래 서로를 지배하고, 파괴의 길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 이 둘이 과연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물어보자. 과연 인간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인가?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면, 결국 이 네가지의 언어를 통해 라스 폰 트리에는 잭이 아닌 인간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 밝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한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욕망에 따른 사회를 건설했고, 그 이면에는 추악한 우리의 본질이 여전히 존 재한다. 마치 잭이 자신의 궤변적 논리에 따라, 시체들로 만든 집을 완성하였듯이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버지는 잭이 지옥에서 3번째로 깊은 곳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더욱 깊은 지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곳인가?


영화관을 나서며, 잭의 살인 행위에 대해 평하고 웃었는가? 세상 속에서, 당신은 파괴되고 도태된 약자를 잊은 채 현대사회의 논리에 따라 무궁한 발전을 찬양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라스 폰 트리 에가 설치한 가장 깊은 지옥을 향해 한 발을 내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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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초반부에, 칸느 영화제에서 자리를 박차고 떠난 100명 남짓의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들이야 말로, 라스 폰 트리에가 이 영화를 통해 교묘히 설계한 심판을 피한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혹자는 이 영화가 살인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라스 폰 트리에는 그저 현학적인 표현으로 살인 을 포장한 괴짜라고 부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가 극도로 잔인하고 현학적인 장면을 통해 말하고자 한 철학은 결국 인간의 본질이다. 빛을 향해 나아가고, 빛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품고 있는 인간 그 자체의 본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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