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생각 _ 그래, 우리는 연필이었다

'그래, 나는 연필이다'를 읽고 나서

by 훈글
스크린샷 2020-09-26 오전 10.40.39.png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답사 경쟁이 심화되던 1960년대, 양국이 엄청난 지성과 경제력을 투자하고 있던 곳은 비단 첨단 우주 기술 분야 뿐만이 아니었다. ‘우주에서 사용할 수 있는 펜을 개발하는 것’ 은 양국이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던 또 하나의 과제였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구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펜은 우주에서 사용이 불가능하다. 중력 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내부의 잉크를 내보내 글씨를 쓰는 펜은 그 기능을 다할 수 없기 때문 이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수십억의 개발비, 그리고 수백명의 나사 연구진들이 투입 되어 개발한 ‘우주 펜’은, 잉크를 사용하는 펜 임에도 무중력 상태에서, 심지어 물 속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펜이었다.


러시아 역시 뒤이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해결책은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효율적이 고, 단순하며 값싼 것이었다: 바로 연필을 사용하는 것.


수십억의 개발비, 수백명의 연구진 없이도, 그저 엔지니어의 귀에 꽂혀 있던 연필은 무중력 상태에서 우주 비행사들이 글을 쓰도록 도우는 본질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갈수록 전자화되는 세상에서 연필은 비효율적이고, 단순한 물건이다. 그러나 하나의 연필 속에는 인 간의 역사와 문화, 지성, 그리고 우리의 기억이 담겨 있다.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매 시험 전날 저녁에 필통 속의 연필들을 직접 깎아 주시고는 했다. 날 카롭고 단정하게 깎인 연필과 함께, 후회 없는 노력의 성과를 거두라고 하시며....


지금도 그 기억때문인지 시험을 볼 때면 항상 연필을 깎아 사용하는 나는 연필을 깎을 때의 나무 향 기와, 연필로 글을 쓸 때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통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성을 떠올리고는 한다.


연필은 단순하다. 그러나 어떠한 첨단 기술도 넘볼 수 없는 본질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바로 글을 쓰도록 하는 것.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변화 없이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그 본질 속에서 우리는 기억과, 번뜩임과, 노력과, 기쁨을 얻는다.


최근 과학계와 철학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는, 포스트 휴먼(Post-Human) 시대에 대한 이슈이다. 신 체와 지성을 대체하는 첨단 기술과 함께,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


박지현 PD가 자신의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조망하는 사람들은, 본질을 잊지 않는 연필을 공부하고, 연필과 함께하며, 인간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다.


‘쓰는 것’의 본질을 잊지 않고 있는 연필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본질을 찾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연필이었다. 그리고 그래, 우리는 모두 연필일 것이다.




© 2019.4.30 훈글_최지훈 all rights reserved.



작가의 이전글훈평 _ Arrival,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