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위대함을 경계하며 될 수 있는 한, 자기 분야에서 명장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까? 이상한 질문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정은 제각각일 테지만 실제 그런 인물 몇 명 쯤은 알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의도된 삶의 속도와 가파르기에 관한 자기판단일지 판가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시각예술의 화려함, 비평적 우위에 서기 위한 분투, 제도화된 경쟁 시스템과 같은 미술계의 일면을 떠올린다면 작가의 숙명이란 포기보다는 획득, 순응보다는 격파해야 할 대상을 찾아내는 세계에 가까워 보인다.
한편, 필요이상으로 각광받거나 남다르게 위대해지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이들에게도 일정한 노력과 자질이 요구된다. 세속적 성공의 지름길과 우회로, 유턴이 불가능한 각각의 지점에 설 때마다 우아하게 퇴각할 타이밍을 간파하거나, 이제라도 되돌아 가고픈 욕망을 억누르고 직진해야 할 당위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가 속한 세상의 ‘카운터파트’(counterpart)가 되기 위해서는 시류를 조망하는 눈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순리를 역(易) 조망하는 교차적 시선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이는 자기 발전의 역사를 초월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모순적 대응 방식이기도 하지만, 종종 예술 창작의 단면에서 감지되는 자기 주도의 ‘탈 조건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잘 하는 것을 더 잘하는 일’에 매몰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몸에 익어버린 창작의 조건들을 배제하고, 때로 배반하는 일이다.
작가 최기창은 미묘하게 세계와 엇박자를 내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기세 좋게 밀어붙이는 것도, 억지로 끌려다니지도 않는 그만의 ‘싱커페이션’[1]은 작업과 작업, 전시와 전시로 이어지는 불연속적 리듬과 강세에서 잘 드러난다. 최기창은 어딘지 이해 받기 어려운 오기와 변덕을 두루 지닌 ‘유명한 무명’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들어맞는 문제적 인물이다. 누군가의 눈에 비친 작가의 모습은 지나치게 위대해지지 않을 방법을 간구해 나가는 태업가이자, 작업에 대한 자잘한 생각을 멈추지 않는 바지런한 예술 노동자이기도 할 것이다. 뚜렷한 고점도 저점도 찾기 힘든 이력 상의 그래프는 주기마다 새로운 매체와 방법론으로 옮겨 가는 전략의 변경으로 인해 그가 간취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선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작가가 하는 일을 대체로 작업의 영역으로 표명될 수 있면, 나아가 작업을 미루거나 실행하지 않는 선택 조차도 창작적 판단이라고 수긍할 수 있다면 작가는 늘 작업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가텔’은 최기창이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꺼내든 키워드다. 클래식 음악 용어인 바가텔 (Bagatelle)은 두 세도막 정도의 소품에 붙이는 불어 명칭으로 사소한 것, 하찮은 것이라는 뜻이다. ‘가벼운 작업’을 지칭하는 ‘바가텔’은 자유로운 악상과 우연한 착상을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어쩌면 훗날 대작이 될 지도 모를 창대함의 시작인 것일까. 다음 날이면 없었던 것처럼 치워놓고 싶은 한갓진 유희의 표상일까. 아마도 그 두 점 사이를 지나는 말캉한 이행상태이자, 폐기될지도 모를 연약함에 가까운 상태일 것이다. <바가텔을 위하여>라는 제목 그대로 작가는 ‘바가텔’ 상태에서 멈춘 작업의 존재를 기념하고, ‘바가텔’적으로 활성화된 작업의 순간을 기뻐하며, 어느 틈에 비대해진 예술의 무게를 사소함의 감각으로 덜어내는 성찰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대형 작업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크기의 캔버스에 잔존하는 것들은 온통 존재의 망설임과 사물의 진동으로 물들고, 묻어나고, 섞여있는 것들이다. 이제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상태인지, 조금 전까지 쌓아올렸던 것들을 차례로 지워낸 것인지 모호하게 섞이고 스며든 색면 뿐이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 다양한 방식의 미술 창작을 시도해 오고, 결코 간단하다 할 수 없는 이력을 쌓아온 중견 작가가 소나타나 교향곡은 커녕 ‘바가텔’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지금의 상황을 우리는 ‘퇴행’이라고 규정해야 할까. 혹은 다음 대작으로 옮겨가는 길목에서 쉬었다 가는 무해한 ‘해찰’ 같은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역방향의 ‘전진’이라 평해야 할까. 아리송한 예단 대신 작업의 가시적 면면을 살펴보는 일은 극단적 평가를 유보하고, 한 명의 작가가 거쳐온 사고의 팽창과 수축의 과정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 같다.
전시장으로 작품들이 옮겨지기 전, 그것들은 최종적으로 간택되지 않은 예비적 상태로 존재한다. 작업실에서 마주한 그의 ‘드로잉’들은 완성된 지위를 얻기 전이지만, 그들끼리 한껏 나부끼며 아직 여물지 않은 서정을 풍부하게 발산한다. 출하를 기다리는 상품처럼 냉정한 평가를 기다리는 대신 창작자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존재들이다. 작업실 한 켠에는 미묘한 그라디언트 컬러로 물들어 있는 마스킹 테이프 줄기들, 망친 것인지 더 작업을 해볼 요량으로 치워 둔 것인지 판별 불가능한 상태의 낱장 드로잉들이 있고, 바닥에는 층층이 포개져 있는 캔버스들이 가득하다. 상대적으로 완성태에 가까운 작업들이 이리 저리 걸려 있기도 하다. 채색이 진행된 작업들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가운데를 비워두고 테두리에 컬러를 집중하여 프레임이 눈에 들어오는 작업, 버려질 마스킹 테이프를[2] 화면 중앙에 위치시킨 작업, 프레임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혀 만든 작업. 그러나 작업실은 총천연의 물감 포말들로 번지고 물들어 있는 박스 상태처럼 보인다. 온갖 컬러가 묻어있는 테이프와 화면, 프레임이 한데 섞여 그것들 간의 수직, 수평적 위계를 따지거나, 원 재료와 부산물, 결과를 구분하는 것 또한 무의미해 보인다.
화가의 아틀리에가 원래 이러했던 것인가. 있는 힘껏 과장을 해보자면 그것들은 보글보글 끓어 넘칠 준비를 마친 부야베스 (Bouillabaisse, 프랑스식 해물잡탕) 냄비, 그 속에 투하할 마르세이유 앞바다의 제철 식재료, 다음 주면 매끈한 핏의 수트로 변모할 구겨진 광목 패턴, 물감을 이리저리 섞어 조색을 갓 마친 몽글몽글한 상태인 것이다. 반대로 치자면, 그것들은 무질서한 상태로 뒤섞인 것들, 어떤 이유로든 사라질 지 모를 예비적 폐기물, 작품 간의 시각적 우위나 완성도의 등급을 정하기 위한 원칙과 기준이 결여된 상태일 수 있다.
갤러리 벽면에 아름다운 자태로 걸려있는 위대한 작품의 상태를 한 꺼풀 한꺼풀 벗겨내다 보면, 전시 이전에 아뜰리에가 있고, 그곳에서 생산된 작품 이전에 작가만의 통찰이 있었고, 그에 앞서 누적된 사소한 경험과 쉽게 밀려나버린 일상으로 회귀하게 된다. 전시는 미분적 상태로 돌진하며,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강한 존재에 의해 덮여지고, 버려진 것들을 작업으로 올려놓는 과정이다. 중심과 주변부, 프레임과 그 내부, 포지티브와 네거티브가 없는 바가텔의 화면들은 공들여 제조한 조화로움, 공인된 미감을 연출하는 것에 기를 쓰지는 않는다. 분사된 물감이 남긴 수평 수직의 운동감과 색채의 미묘한 번짐 속에서 우리는 습관처럼, 기어이 위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고 말 테다. 오직 색으로만 채워낸 드로잉의 흔적들은 역설적으로 미술사에 등재된 색면 회화와 단색화, 붓질의 수행성을 강조하는 일군의 회화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미술 시장에서 여전한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는 보편적 미감이기도 하다. 과정이나 의도를 알지 못한다면, 멀리서 오해하기 딱 좋은 ‘적정하고 기분 좋은’ 그림처럼 보이는 것은 작가가 준비한 총천연의 블랙 유머인 것일까?
그래피티 용 스프레이 물감을 분사하여 수직, 수평의 결을 만들고 몇 번 더 올려 나름의 깊이감을 생성해내는 제작 방식은 이미 전작에서부터 적용되어 온 기법이다. 아크릴이나 유화와는 다른 운동감으로 인해 사방에 포말을 뿜어내는 스프레이 회화는 거리 미술의 분방한 속성에 가까워 보인다. 공정에 있어 완벽한 성공도 실패도 없으며, 맞닿은 면에 묻어나고 스며드는 침투력 또한 재료 선택의 적절한 근거일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생성해 낸 것들을 ‘페인팅’이 아니라 ‘드로잉’ 이라고 언급한 것 또한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과정으로서의 드로잉은 결과로서의 페인팅에 선행하는 원초적인 과정이자, 결과를 정밀하게 조작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팔과 손목의 운동과 같은 최소한의 방향과 강도, ‘픽스’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기꺼이 맞닿을 수 있도록 한 의도, 마스킹 테이프를 이용한 컬러와 면적의 겹침 정도가 작가가 구사할 수 있는 몇 가지 창작의 룰일 것이다.
처음부터 흰 색이었던 종이와 밤새 무엇인가 잔뜩 썼다 깨끗하게 지워낸 흰 종이는 다를까.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 것일까. 같지만 하나도 같지 아니하고, 다르지만 어떤 부분만큼은 유사한 조형의 세계에서 우리는 공연히 정답 없을 질문들을 쏘아 올려 보곤 한다. 최기창이 어제 오늘 내놓은 회화는 그제의 것과는 다르고, 내일의 것과 또 다른 것일 테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물감으로 뿌리고 적셨다고 하더라도 “한 번은 한 번” 인 것이다. 나는 그 부분에서 최기창의 작업들이 조금은 다른 작품의 선도(鮮度)와 미묘한 차이점을 창출해낸다고 믿는다. 그린 적 없는 그림이지만, 어쩐지 그림처럼 보이는 그의 드로잉들은 아마도 출렁이는 스프레이가, 때마침 창 밖에서 들어온 그날의 바람이 그려낸 ‘언-페인팅’(un-painting)이리라 생각해 본다.
갤러리로 이동해 올 작업들의 미래적 아름다움을 상상하며 나는 다시 한번 바가텔이라는 생경한 단어를 입안 가득히 머금어 본다. 매일 반복되는 성실함과 몰입의 습성이 어쩌면 독이 되지 않도록 오늘의 할 일을 그만 마감하기. 독창적 생각들이 특이함의 정조 안에 갇혀 버리지 않도록 한두 번 쯤 휴지통에 버리기. 다음 날 슬쩍 꺼내어 새로운 가능성을 살펴 보기. 바가텔을 위한 행동 방식은 이러한 인간적인 자연스러움과 어쩔 수 없는 욕망 안에서 순환, 작동되는 것이리라. 나의 삶이, 누군가의 예술이 그러하듯이.
[1] Syncopation,
한 마디 안에서 센박과 여린박의 규칙성이 뒤바뀌는 현상, 여린박에 강세를 놓거나 센박을 연장하거나 붙임줄로 다음 머리에 연결하여 만든다.
[2]“Painter’s tape”
라고도 불리는 마스킹 테이프는 물감이 묻어나지 않아야 할 곳을 가림으로써 화면에서 깔끔한 기하학적 선,면의 창출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재료가 아닐 수 없다.
* 2022 최기창 개인전 <Für Bagatelle/바가텔을 위하여>(08.30-10.03) 전시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