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세대에 속한 이들이 이 도시의 경관과 장소의 흥망에 대하여 갖는 평균치의 기억과 기억의 해리 속에서 생활했고, 생각하고, 작업해왔다. 공공 공간에서 시도했던 몇몇 프로젝트들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초기의 작업들을 복기해보면 정재연은 ‘역사’와 ‘공간’이라는 말이 품고있는, 때로 지나치게 육중한 의제들에 곧장 달려들기 보다 개인, 일상, 주변, 구석과 같은 조금은 미온적인 자장 안에서 작가적 발언들을 재미있게 실천해 온 편이다. 반짝이는 스펙터클과 특별한 형질의 오브제를 만드는 대신 유동적인 상황을 모의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달리 선택하고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정재연 작업의 특징적 면모 중의 하나였다.
그러한 이력에서 가장 최근 몰두해 온 프로젝트 『로스트 코너』는 말하자면, 조금 더 뚜렷한 실체적 대상을 중심으로 작업이 구성된다는 점에서 어떤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역사적 건축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다루는 것이 그렇고, 어떤 식으로든 대상을 시각적으로 구성하는 행위가 그렇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밟아온 과정들을 다시금 흐리는 듯한 추상적 퍼포먼스와 작업의 메시지를 여러 갈래로 열어 두고자 하는 특유의 미적 태도는 일관적인 데가 있다.
정재연_토대를 위한 스케치_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_00:06:22_2019
정재연_토대를 위한 스케치_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_00:06:22_2019_부분
『로스트 코너_메모리 아카이브』는 지난 전시 『로스트 코너』(2018)로부터 연결되는 후속 전시의 성격을 분명히 갖는다. 요컨대, 정재연은 자신의 유년기로부터 불혹에 접어든 현재의 자신을 잇는 중추적 장소 기억 중 하나인 옛 박물관(구 국립중앙박물관, 구 조선총독부)의 그림자 안쪽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다.
이전 전시가 개인의 기억과 공적 기록 간의 불화를 고백한 자리였다면, 이번 전시는 그가 느꼈던 당혹감과 불편함의 정서를 객관적 거리에서 조명하고, 여러 주체들의 분열적 입장들을 얼기설기 맞대어 보는 자리다. 기억을 둘러싼 원근은 자신의 내밀한 기억으로부터 타인들의 기억들로 재조정되었고, 소실되고만 옛 건축의 도면을 에칭으로 복각하던 고요한 시도들은 낯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대담한 여행으로 변모하였다. 시각예술가로써 특정한 공간에 사로잡혔던 감정적 매혹과 그것을 이성적 사유로써 거부, 분리, 합리화하는 일련의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건축에 대한 리서치를 촉발시켰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빚어진 개인의 역사윤리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기투영적 탐구로 발전되었다.
이번 전시는 지난 일년 여간 작가가 수집해 온 공적 기록들과 온라인을 떠도는 키보드 역사학자들에 의해 편집된 기억의 파편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만났던 존재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사적 리포트이기도하다.
어느 사이, 서너 해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이번 작업을 준비하면서 정재연은 역사 다큐를 제작하는 유사 저널리스트로, 지나간 과정에서 겪어온 심리적 분투와 일종의 토대 없는 역사 공간을 미로쌓기로써 은유하는 설치미술가 겸 퍼포머로, 필름 에세이를 이끌어가는 특정한 목소리로 분한다.
정재연_토대를 위한 스케치_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_00:06:22_2019
전시는 극한의 정치역사적 질곡을 겪어온 건축물이자, 분열적 장소성 그 자체인 구 조선청독부 건물을 여러 입장에서 추억하고, 상실하며, 미화하고, 동시에 훼절한다. 작가가 찾아내고, 청취한 여섯 화자의 입장과 신조를 통해 우리는 공적 기록에서 누락되거나, 합의된 집단 정서에 어긋난 목소리를 마주하게 된다. 기록과 기록의 엇갈림, 기억과 기억 사이의 배반은 필연적으로 작업을 추동하는 요소이다.
정재연_메모리 아카이브_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흑백_00:20:26_2019
정재연_토대를 위한 스케치_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_00:06:22_2019
지난 몇 년, 국가권력이 애써 지워버린 건축의 자취를 정교한 선분으로 채워보고, 텅 빈 대지 위로 주춧돌을 이어가며 사라진 공간의 흔적을 재건하고, 장미창의 고혹적인 그림자를 드리워도 보고, 이윽고 흩어져버린 목소리들을 찾아 나섰던 여정이었다. 고단한 시간들 속에서 정재연이 대면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건축, 장소, 역사, 민족국가가 그려낸 사분면 안에서 부단하게 좌표를 옮겨오면서 만화경처럼 갈라지고 일그러진 기억의 자취였을까.
결국 스스로에 대한 우회적 탐구는 아니었을까.
시간에 마모되고, 굴삭기에 패이고, 넘치는 말들로 덧씌워지고 없어진 자리. 아마도 한동안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 정재연의 이상한 구석자리들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