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r united Aug 15. 2023

홍성준 회화의 지질학

쌓을수록 평평하고 덜어낼수록 깊어지는

Enfolding the Air

 

 

홍성준 회화의 지질학: 쌓을수록 평평하고 덜어낼수록 깊어지는



글 조주리 (전시기획, 미술평론)




많은 경우 예술 작품은 작가의 면모를, 때로 그 이면까지도 닮아 있다. 당연한 사실을 나는 전시를 앞둔 작가 홍성준의 예전 작업과 출품 예정작품을 맞대어 보며 재확인하게 된다. 여러 방면의 조형적 변주와 개념적 탐구에 몰두했던 시기를 지나, 마음 한 자락에 매달려있던 작은 미련이나 상념들이 소거된 듯한 오늘의 작업 풍경은 어느 때보다 명징해 보인다. 작업이 지닌 단단함은, 그러나 공기처럼 가붓하고 실바람처럼 보송한 감각으로 전달된다. ‘천 겹의 이파리’를 뜻하는 프랑스식 페스츄리 밀푀유(Mille-feuille)처럼 한 겹 한 겹 정성스레, 그러나 최대한 가볍게 쌓아 올린 작업의 무게는 화면 위에 묻어난 물감만큼의 두께로 남아 누군가의 시선을 통과해 망막 너머의 기억으로 내려앉는다. 평면 위에 시간의 깊이와 행위의 궤적을 담는다는 수사의 빈곤함을 입 속에 잠시 가두어 두고, 또 달리 생각해본다. 한편으로, 그토록 얄따란 깊이와 제한된 면적만이 작가에게 허용된 조건이므로, 나 또한 눈 앞에 펼쳐진 화면의 너비와 깊이만을 직시하며 창작의 전후를 추리하고, 가려진 모든 것들을 전투적으로 상상해 본다.  


수평과 수직. 아름다운 간격과 높낮이로 작품이 걸린 전시장의 질서와 흰 벽을 배경삼아 펼쳐진 색상 팔레트를 가늠해 본다. 그러나 작업의 논리를 성급하게 해설하기에 앞서 작가와 작품의 거리, 나아가 작가가 작품에 대해서 갖는 정서적 투영과 지적 자신감이 포개어지는 어떤 교차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안도감이 든다. 작업에 대한 막

힘없는 기세와 긍정적 감정이 스치며 지나는 어떤 자리와 막 조우하게 된 것. 그리고 조

금이라도 나아질 무엇인가를 위해 애면글면 하고 있다고 여길 지 모를 어제오늘의 고단

함이 작업과 작가 사이에 놓인 다정한 거리에서만 발산되는 창작적 동력임을 

말해 줄 수 있어서 말이다. 


맨 처음 작품과 작가와의 거리는 지나치게 밀착되기 마련이지만 매일 매 순간, 서로 조

금씩 멀어졌다 일정한 거리 안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예술적 시간의 회절(回折) 속에서, 몇 번이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끈질긴 여정이자, 많은 종류의 예술 창작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공기를 감싸는(enfolding the air)’  작업의 몸체가 발하는 따스한 존재감과 신비스러운 생동감을 누군가에게 전하고자 하는 홍성준의 의도는 이제 막 그가 도달한 자리이자, 작가와 작품이 서로를 공평하게 응시하는 거리 감각, 부단한 성실함이 자칫 스스로의 세계를 짓누르지 않기를 바라는 창작에 대한 중량감 그 자체일 것이다.  


아틀리에 너머의 세계를 좇던 시선의 분주함이 잦아들면, 작업을 대하는 내적 논리가 선명해지는 때가 온다고들 한다. 캔버스와 작가의 일상적 거리, 작품에서 작품으로 도약하고 멈춰서는 타이밍, 붓을 쥔 손과 손가락의 움직임, 어제까지의 작업과 오늘 할 일 사이를 오가는 동안, 비로소 가능한 ‘선명한’ 순간이다. 지난 10년에 걸쳐 통상 여섯 번째 개인전을 치러 온 작업 이력에서 이번 전시는 어떤 의미론과 위상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작가는 어느 만큼의 선명도로 작품을 대하고, 전시를 채비해온 것일까. 작업실에서의 대화와 전시 준비 단계에서 서술한 작가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지금의 레이어 시리즈가 “회화 작가로서의 삶을 좀 더 즐겁게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는 솔직한 대목이다. 


따지고 보면, ‘캔버스 위의 물감’ 이라는 가장 단순한 회화적 요체, 작품과 공간, 관람객으로 이루어진 전시 현장을 관찰하고, 이를 작업 안으로 개입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을 예비해왔던 홍성준의 창작 방향은 시대의 취향과 유행을 탐색하는 대신 그만의 독자적인 속도와 리듬으로 전개되어 온 측면이 있다. 전시를 보는 행위 자체를 비평적 주제이자, 작품이 재현되는 씬 자체를 구체적 대상으로 삼았던 연작을 통해 홍성준은 전시 속의 전시, 작품 속의 작품이라는 ‘겹’ 구조를 표현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작품을 둘러싼 중층적 시선을 회화의 내부와 그 바깥으로 상호 침투시키는 스마트함을 보여주었다. 


변화하는 매체의 조건과 변치 않는 양가적 속성을 탐구한 작업의 면모는 작업을 위한 예비 데이터인 디지털 사진 이미지를 평면 위에 적극적으로 병치한 또 다른 시리즈로 이어지기도 했다. 2020년 이후 회화적 레이어와 깊이에 관한 일루전(Illusion, 환영)을 평면 상에서 강조하는 방식은 이전의 작업과 양식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으로 비춰진다. 평면 위에 평면을 재현하거나, 그들 사이의 경계를 뭉근한 그림자를 통해 강조한 결과물은 작업의 전후를 살필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추상 실험의 일면 정도로 축소 해석될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 안에서 간취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작가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회화 재료의 물성과 재현의 속성을 도구삼아 행하는 작가 식의 어법, 일종의 매체적 유머에 있다.


지지체와 바탕, 안과 밖,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디지털과 아날로그, 그림과 그림 아닌 것에 관한 이항 대립적인 요소에 사실적 기법을 동원하여 끊임없는 혼선을 가하는 것이야 말로, 실로 회화적인 농이자, 매체에 관한 자전적 서술인 것이다. 오래 전 작업으로부터 가장 최근의 작업을 살펴보면, 표현의 양상과 전략은 달라졌지만 그 기저에는 회화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이에 대한 자기 정의를 지속적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다. 회화를 구성하는 가시적 조건과 보이지 않는 구조를 교차시키며, 작업과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화면 위를 선회해 온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Enfolding the Air 로 명명한 이번 전시는 최근 몇 년간 구축해온 작업의 논리가 중첩되고, 여러 방식의 조형적 시도들이 풍성하게 계열화되고 재편되는 예술적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미 근래의 전시 Flowing Layers (파이프갤러리, 2022)를 통해 스스로가 설정한 작업의 쟁점에 대한 회화적 대응 양상과 비평적 코멘터리가 일정 부분 정립되었고, 시각예술가로서 구사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 기법과 공간에서의 효과적 적용을 통해 솔로 작가로서 지닌 역량을 입증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 각별하게 눈여겨보고자 하는 것은 새롭게 시도된 재료와 기법에 대한 시각적 경탄, 회화에 대한 매체기술적 접근만은 아니다. 오히려, 전시를 거듭하며 매끈하게 조탁되기 마련인 작품 서술과 디자인적 감각, 재료를 다루는 공예적 수행은 작품과 작가가 관계 맺는 특수한 면면을 덮어버리는 때가 있다. 한 동안 화면 안팎에 다양한 중층들을 집중적으로 설계하고 이를 매개로 한 새로운 통로를 열어두고자 했던 시기를 지나, 작업과 작가의 신체성이 적극적으로 상호 침투하고, 작업의 물리적 존재감으로부터 현상학적 경험을 겪은 작가의 인식항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 


최근 몇 해 동안 전개되었던 작업의 중심어였던 ‘레이어’라는 단어가 전시의 표제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어쩐지 전시를 이끄는 것은 레이어의 설계자인 작가로부터 작품 그 자체로 이동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레이어는 화면의 물리적 구조나, 그 위에 물감으로 표현해 낸 이미지들의 환영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전방과 주변 공간, 보는 이의 몸과 마음에 광활하게 침투하며 일종의 ‘계’(界)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수수께끼와 같은 전시를 마주해야 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이란 가령 다음과 같은 사고의 전략이다. 오늘 이 시간의 전시가 작가 홍성준의 초기작을 불러모은 ‘회고전’이라도 되는 양, 지난 시간 작가가 자신의 회화와 세계의 예술에 대해 느꼈던 의구심과 확신이 어떻게 쌓이고, 흩어지고, 우회하고, 교차하며 지금의 작업으로 이행했는지에 대한 사고의 조각들을 사방에서 불러 모으는 일. 눈앞에 현존하는 아름다운 평면들을 단서 삼아 그 속을 지나는 미묘한 주름과 분사되고 뭉친 흔적을 살피고, 무엇인가 단단하게 굳어지기 전의 말랑한 시간으로 돌아가보는 일은 어떠한가. 공기 속에 산화되고, 시간 속에 침잠한 무수한 창작의 레이어를 복원해보는 자세로 전시를 살펴보는 일은 마치 잘게 부서진 토양의 표면을 통해 심층부의 역학을 되짚어가는 지질학자의 그것과도 같다.     


오늘날의 화려한 시각예술에 ‘지질학’이라는 고졸한 수사를 연합하여 볼 수 있다면 아마도 그 까닭은 물성의 형성과 지층 사이의 역학관계를 좇는 과학적 탐구의 일면에 유구한 회화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간헐적인 인식 전환과 회화 연구의 역동성을 투영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작품 또한 돈으로 값어치를 매기고 거래하는 상품의 범주에 들지만, 작가의 온 사유와 신체성이 각인된 물신(物神)이자 관람객의 미적 욕망과 탐구심이 투영될 때만 그 속을 보여주는 의뭉스러운 블랙박스기도 하다. 쌓을수록 평평해지고, 덜어낼수록 깊어지는 역학적 원리는 꼭 지질학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늘 작가의 면모가, 작품의 이면이, 전시의 에너지가 그런 것일 수도 있기에. 


홍성준, <Enfolding the air> 전시전경,  2023, prompt project 
홍성준, <Enfolding the air> 전시전경, 2023, prompt project



*프람프트 프로젝트에서  2023년 5월 3일부터 6월 11일까지 개최된 홍성준의 개인전 <Enfolding the air>의 작가론 전문을 재인용한다. 


아티스트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ZoZUxHVTyDY


작품 이미지 더 확인하기

https://promptproject.kr/EnfoldingTheAi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