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해 동안 박서연은 집중적인 이미지 탐구와 조적(組積)을 통해 자신만의 온전한 회화적 세계관을 구축해왔다. 멀리서 마주한 그의 작업은 강렬한 색채와 시각성의 돌출, 그리고 도상의 방대함으로 인해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것은 마치 중세 회화처럼, 화면에 기입된 각각의 도상을 식별하고 특정한 장면을 읽어내야 하는 과제를 제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작업 궤적을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저’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오히려 ‘이’ 세계를 탈시각적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거침없는 붓끝에 실려온 것은 친밀한 도상도, 이국의 표상도 아니다. 동서양 문명사가 구축해온 이미지의 계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광대한 시간 속을 질주하듯, 작가는 자신이 본 것들을 화면 속으로 옮겨오고 심술스럽게 흩트려놓는다. 그것은 일종의 자의적 번안물이다. 내면의 일부를 중계하는 회화 앞에서 이미지를 읽어내려는 오래된 관성을 잠시 눌러둘 때, 비로소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氣)의 흐름과 물결처럼 흩어지는 감정의 잔상을 마주하게 된다.
매년 개인전을 이어오며 다수의 전시 프로그램에 참여해온 이력만 놓고 보면, 그는 경력 관리에 빈틈이 없는 ‘요즘 작가’의 전형처럼 보일 법도 하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쌓여가는 작업의 양과 전시의 숫자 같은 통계적 지표와는 별개로, 그의 작업은 여전히 출발선 위에 서 있으며, 여러 힘들이 분주하게 길항하고 있다. 예컨대, 무의식적으로 이미지를 그려내려는 내적 충동과 양식에 내재된 법칙과 의미를 정교하게 구축하려는 의지, 지금껏 쌓아온 세계를 확장하려는 욕망과 그로부터 훌쩍 벗어나고자 하는 탈주의 본능, 그리고 오늘날 한국 미술계의 경향성과 그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배타적 감각이 긴장을 이루며 공존한다.
한 방향으로 정갈하게 수렴하기보다, 이리저리 산개하는 생각과 움직임이야말로 박서연의 작업이 지닌 생동감의 원천이다. 발산의 힘은 작업의 결을 수평으로, 또 수직으로 확장시키며, 어느 지점에서 다시 수축해야 할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모멘텀(momentum)이 된다.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을 외부세계로 꺼내오는 일은 중요한 위상 변경을 가져온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다수의 전시를 스스로 기획하고 조직해왔다. 유사한 개념을 하나로 뭉치고, 세심하게 조탁하는 노력이 수반된다. 화려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불교적 인과를 상징하는 ‘카르마(Karma)’, 개인 내면의 양가적 심리를 드러내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와 같은 개념들이 배치되어 있다. 전자가 문명의 시공을 초월한, 인간 존재의 보편적 작동 원리를 가리키는 우주적 개념이라면, 후자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서 감지되는 지극히 사적인 정동이라 할 수 있다.
박서연의 시선이 극대(우주적 차원)와 극소(심리적 차원)를 오가고 있고, 그의 작업이 정신의 확장과 축소 사이를 진동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작업에서 드러난 구상적 자취 사이로 추상적 색면과 신체적 흔적이 뭉개지고 중첩되는 것 또한 동일한 구조에서 기인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진동이 기원 전후의 고대적 경구와, 현시대 SNS 속을 떠도는 상품화된 언어 사이의 극단적 낙차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서구 철학 담론의 중심을 비켜나, 새롭게 부상한 동양적 생명 윤리와 우주론적 사유를 끌어들이는 동시에, 무협소설과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의 감각적 클리셰를 능숙하게 접속시킨다.
이를테면, 중국 고전 『산해경』, ‘공각기동대’류의 일본 SF 애니메이션, 한국의 무속 전통, 그리고 서구의 환상문학과 오컬티즘 등이 거대한 시각적·서사적 아카이브로 호출되어, 그의 작업 세계를 광활하게 확장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반자동적으로 이미지를 분출하도록 단련된 화가의 손이 잠시 멈추는 동안, 문학적 탐닉과 반문화적 기호들에 대한 탐색이 이뤄지는 것은 작가의 삶을 움직이는 일종의 반작용의 원리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박서연의 작업은 시대와 문명의 양극단을 가로지르며, 인과와 욕망, 성찰과 쾌락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예술적 좌표를 탐색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시각예술 진영에서는 이와 유사한 부류의 작업들이 이미 일정한 유형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가의 회화적 실험이 놀라울 만큼 조숙한 통찰에서 비롯된 만큼, 그 발전의 여정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상투적 재현이나 피상적 표현주의로 소모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존한다.
별개의 지점을 생산하는 힘이 결국 동일성의 내파(內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박서연 회화의 이중 부정 즉, 동시대 작업과의 연결 속에서 동일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와, 자기 작업으로부터의 단절감을 생성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여러 경로로 접속되는 각각의 전시는, 일상의 작업을 탈속의 작품으로 전환해 선보이는 플랫폼이자, 풀리지 않는 자기 질문을 다양한 어법으로 변주하며 스스로의 방향을 가늠해보는 중간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전시가 또 다른 전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미묘한 수준의 작업 재정의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번 전시에 앞서 열린 개인전 《점을 쫓는 자》(2025.7.3–7.27,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지원전시)는, 박서연이 그동안 탐색해온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한층 더 밀착된 시선으로 좁혀 들어가는 시도를 보여준다. 해당 전시에서 작가는 이전까지 일련의 작업을 통해 다루어온 주제적 탐구를 보다 일인칭의 시점, 즉 작업 행위 속에서 스스로의 생활 철학으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으로 전환한다.
‘점’은 점술(占)을 의미하는 동시에, 선과 악, 업보와 뒤따른 인연, 필연적 변화와 우연한 기적이 교차하는 좌표이자 궤도로 기능한다. 그 하나의 ‘점을 좇는 행위’는 작가가 즐겨 읽는 무협지 속 주인공의 여정처럼, 한 개인이 짊어진 숙명과 그에 맞서는 내면의 신념을 상징한다.
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수행과 실천의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겹겹의 도상(圖像)의 흔적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중첩과 이동의 궤적은 진실과 거짓, 변화와 변신의 서사로 기운생동한다. 이 세계의 부흥과 저 세계의 붕해는 결국 아스라한 점과 선, 면으로 남아, 한때 또렷했던 상징의 잔해 위에 새로운 시간의 층위를 쌓아 올린다.
드로잉과 평면 회화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입체 설치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로 확장되며 이미지의 입체성과 유동성을 탐색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여전히 시효성에 대한 신중한 검토를 요구하며, 그 속에서 공간에 대한 해석과 다원성의 실험이 더욱 깊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남겨진 자리들》(2025, 천안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전시)에 선보인 설치는 최근작과 기존 작업을 재편·재구성한 결과물이다. 박서연의 작업을 심리적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그것은 여러 층위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촉발하는 동시에, 인문·사회학적 담론 속에서 통용되어 온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조작적으로 재규정할 필요를 제기한다.
이는 그의 작업이 민족과 인종의 이동사에 기반한 기존의 ‘디아스포라’ 개념으로는 포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서연이 다루는 것은 지식의 유목주의, 디지털 영토 속에서 규정되는 자아, 그리고 과잉 데이터의 세계 속에서 미아처럼 방목된 세대의 존재 양식에 가깝다. 21세기 키드가 지닌 역사적 원근법은 극단적으로 자의적이며, 때로는 방종에 가까울 만큼 지식의 생성과 이미지의 수정에 자유롭다.
모든 것이 손쉽게 생성되고 소멸되는 디지털 세계에서, 붓끝에 스며든 물감으로 무언가를 그려낸다는 행위는 그만큼이나 주술적인 몸짓이다. 박서연의 회화와 설치 작업이 이러한 동시대적 조건을 의식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지정학적 이동이 아닌 정신적·존재론적 이주의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그렇다면 작가가, 혹은 작가가 개념적으로 동의한 전시가 특정하는 ‘남겨진 자리’란 언제, 어디, 그리고 누구의 영토일까? ‘떠나온 자리’만큼이나 규정하기 어려운 난제다. 생물학적 연령의 차이를 떠나, 동시대인 대부분은 방대한 시각 정보의 체계성과 접근 가능한 데이터의 영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계 만물의 실루엣과 내경(內徑), 외곽, 깊이, 방향을 암시하는 것들이 순식간에 생성되고 사라지는 시대다. 이에 비해, 손의 감각과 눈의 직관, 몸의 운동성으로 그리고, 긋고, 칠하고, 흩뿌리고, 다시 덮는 작가의 행위는 그 자체로 원시성을 지닌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더욱 숭앙되는 총체적 감각의 형식이다. 박서연의 회화는 바로 그 원시적 감각과 동시대 삶의 속도 사이의 간극 속에서, 이미지의 존재 근원을 다시 묻는 하나의 실험으로 읽힌다.
뫼비우스의 띠.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단일한 표면에 관한 근대 수학의 개념이자, 동양의 윤회(輪回), 불교의 연기(緣起), 그리고 니체의 ‘영원회귀(Ewige Wiederkehr)’와 통하는 사유의 형식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영원한 회귀의 굴레 안에서, 성장은 곧 쇠락이며, 행복은 고통이며, 단절은 다시 시작이 된다. 따라서 이 띠의 속성을 삶의 구조이자 작업의 윤리로 대입해 본다면, ‘남겨진 자리’와 ‘떠나온 자리’ 또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등가(等價)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흔하디 흔한 무협소설 속 주인공이 쓰러짐으로써 한 단계 성장하듯, 모든 결핍과 파국은 곧 새로운 생성의 전조가 된다. 각자의 디아스포라는 결국 시시각각 달라지는 궤도 안에서만 규명 가능한, 한시적인 소실점이자 또 다른 시작점일 것이다. 작가가 좇는 점과 그를 따라오는 점 사이의 거리와 장력을 짐작하며, 캔버스에 묻어난 적(赤)과 흑(黑)의 번짐을 바라본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백(白) 혹은 청(靑), 작가의 궤도를 따라 그가 휘젓고 지나간 상념의 잔상을 더듬어본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궤도 위에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