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no-pia

베를린, 2015.

by jrajvxjthrkk



출근길, 지하철을 타러 걸어가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한다. 어제는 하던 일도 다 끝내지 못한 채 9시가 넘어서야 사무실을 나섰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나 아닌 아무나 와도 할 수 있는 그런 일들. 회사 밖은 전쟁터라지만, 직장인의 삶도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다.


스포티파이를 켠다. 한때 소리바다에서 MP3를 다운로드하던 시절이 있었다. MP3 플레이어에 다운로드한 파일을 하나 둘 보물처럼 옮겨 담고, 버튼을 넘기며 노래를 골라 듣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던 시절. 곡 하나하나가 나의 보물이었던 낭만적인 시절. 이제는 일에 치이고 시간에 쫓기고 생각해야 할 것들이 늘면서 곡을 하나씩 골라 듣는 것도 귀찮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 기분에 따라 손이 가는 앨범 하나를 틀어놓고 수록된 곡들을 순서대로 듣는다. 구성된 곡들의 서사와 앞뒤 곡들 사이의 강약에 따라 느껴지는 흐름. 하나의 드라마, 영화를 압축해 소리로 듣는 듯하다.




‘Dior and I'는 라프 시몬스가 디올의 여성 컬렉션을 맡게 되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의 첫 번째 쇼에서 첫 번째 모델이 걸어 나올 때 흘러나오는 Plastikman - Pakard. 스피커를 울리는 심장소리 같은 비트와 미니멀한 전자음 멜로디의 결합은 마치 아포칼립스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치 내가 그 음악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만 같은 강렬한 경험. 어두운 상영관을 무겁게 짓누르는 공기를 뚫고 음악이 페이드인 되면서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무대에서 모델이 걸어 나오는 순간이 슬로모션으로 말 그대로 영화처럼 흘러가는데, 그 순간 나는 저 어딘가 존재할법한 제3의 시선이 스크린 바깥에서 내 삶을 슬로모션으로 돌려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꼭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모든 빛을 없애고 어둠 속에서 들어보기를.



https://youtu.be/oQduttGOQSE


https://youtu.be/fDBcxEMHNMs






음악에 장르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음악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패션쇼가 끝나면 여러 매체에서 그 쇼에 대한 분석 기사를 쏟아내는데, 음악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름다움을 이성적으로 해설하려는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예술은 인간이 임의로 재단한 이런저런 장르로 분류할 수 없으며,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언어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적인 무엇인가를 글로 규정한다는 건 참으로 허무한 일이다. 또 음악의 장르를 논하는 것 또한 불가피하면서도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는 예술의 한 장르로써 음악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말고, 개개인의 감각에 따라 느껴지는 마음의 울림, 음악 그 자체로 들어야 한다.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보단 잔잔하고 리드미컬한 음악을 즐겨 들었던 나는 그때 영화관에서 새롭고도 강렬한 무언가에게 압도당했고, 비슷한 느낌의 음악들을 하나둘 찾아보다가 그해 휴가는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이끌림을 따라 전설적인 Berghain에서 밤새 음악을 듣기도 했다. 내가 혼자 클럽을 찾게 될 줄은 몰랐지만.






Berghain 내부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 한번 들어가면 주말 내내 머무를 수 있는데, 입장이 쉽지 않아 악명이 높다. 일부러 최대한 어두운 분위기를 내고 갔는데 다행히 혼자라 그런지, 비주류 아시안이라 그런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었다.(입장을 거부당하는 이유는 그 누구도 모른다더라.) 연기 가득한 어두운 세계에서 춤추며 옷을 하나둘 벗는 사람들, 바에 앉거나 소파에 누워 술을 마시며 한숨 돌리고 쉬는 사람들, 아침 해가 뜨면서 빛이 서서히 들어오는 거대한 창가(Panorama Bar!)와 드러나는 비밀의 공간들, 지하 구석에서 알몸으로 뒤엉켜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그곳에서의 경험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무엇인가 규칙적으로 두드렸을 때 들려오는 소리를 신성시했다. 축제를 하거나 신을 향해 제사를 올릴 때, 그 중요한 모든 순간에 타악기가 인간과 함께 해왔다. 오늘날에는 타악기뿐만 아니라 전자기기를 통해서도 인위적인 비트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런 심장박동과 같은 비트는 그만큼 뿌리 깊은 소리이자 음악이며, 나는 규칙적인 비트가 있는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거기에서 느껴지는 어떤 원시적인 힘에 늘 압도당한다. 그래서 가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격리되고 싶을 때면 테크노를 찾는다. 베를린에서는 Berlin Atonal이라는 무성 음악 축제가 매년 열리는데, 언젠가 다시 베를린을 찾게 된다면 그 시기에 맞춰서 가고 싶다. 어쩌면 바로 다음 휴가에.




p.s. Berghain의 파노라마 바 플레이리스트도 요즘 자주 듣는 음악이다.

https://open.spotify.com/playlist/3JPJht8r5wkEMI1t8fLpkw?si=v_4xv5NZTNCAMByouyv5-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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