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텅 비어 있었다.
스물네 살의 봄. 대학 도서관 3층 열람실, 창가 자리. 당신은 늘 같은 시간에 와서 같은 자리에 앉았다. 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책장을 넘겼다. 한 장, 또 한 장.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저기, 볼펜 하나만 빌려줄 수 있을까요?"
당신이 돌아보며 건넨 첫 마디.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어 있던 마음이 당신으로 채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신과 걷던 캠퍼스 길. 함께 마시던 자판기 커피. 밤늦도록 나눈 전화 통화. 평범한 일상들이 특별해졌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당신이 읽는 책을 읽고, 당신이 가고 싶어 하는 곳에 갔다.
나는 당신 안에 갇혀 있었다. 아니, 기꺼이 갇히고 싶었다.
"너랑 있으면 내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어느 날 밤, 당신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평생 간직할 보물처럼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다.
나는 분명, 당신의 허물이었다. 당신이 곁에 있기만 하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었다. 취업 준비의 고단함도, 불안한 미래도, 텅 빈 통장 잔고도. 당신은 내게 일어날 이유를 주었고, 웃을 이유를 주었고, 살아갈 이유를 주었다.
"우리 평생 함께하자."
졸업식 날 밤, 한강 다리 위에서 당신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믿었던 순간이었다. 당신은 나의 전부였고, 나의 영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다. 직장을 구한 당신은 점점 바빠졌고,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전화는 짧아졌고, 문자는 간결해졌다.
"요즘 너무 힘들어. 조금만 참아줘."
당신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한 달, 두 달, 석 달.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말했다.
"미안해. 나… 우리 조금 쉬자."
쉬자는 말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다. 끝이라는 뜻. 당신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 허물은 벗겨졌다. 자유롭던 날개는 갈피를 잃고 추락했다.
몇 년이 흘렀다. 우연히 SNS에서 당신의 소식을 들었다. 결혼한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과. 환하게 웃고 있는 당신의 사진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당신은 내게 허물이었다. 흔적처럼 스쳐간 아픔이었고, 통과의례처럼 누구나 겪는 일 중 하나였다.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성장통 같은 것. 만약 당신에게 내가 첫사랑이었다면, 나는 어쩌면 당신에게서 벗겨진 허물이었을 것이다.
뱀이 허물을 벗듯, 당신은 나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당신의 성장이었다면, 나는 당신이 벗어버린 과거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허물이 되고, 누군가에게서 벗겨진 허물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