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속 화초보다는 들풀이고 싶다

by 구기리

언젠가부터 이명이 생겼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자신을 위한 보호 기제처럼 마음속 깊은 곳, 숨겨두었던 감정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 새벽이 넘어가는 시간에서 울려 퍼지는 이 이명소리를 잠시라도 외면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평안한 단밤을 이룰 텐데, 그러지도 못하는 것은 감정의 진폭과도 닮아 있다. 진폭이 커지면 커질수록 겁쟁이를 위한 울림이 방안 가득히 퍼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아무렇지 않게 만지작거리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실타래처럼 현재의 삶은 시궁창 같았다.


시간은 유수와도 같다. 손을 뻗어 막을 수도 없으며, 이미 흘러간 것을 되돌리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삶이라는 항해 속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이 세상에 완벽한 선택이 없는 것처럼 해야만 하는 선택만 남아 있을 뿐, 그렇게 미루고 미뤄버린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마치 사망선고인 것처럼,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는 것이 아까운 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는 것은 선택을 위한 내면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보다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피어나는 들풀이고 싶다.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보호받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뿌리로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삶. 절망은 언제나 인간을 가장 고요한 절벽 앞에 세워 우리에게 묻는다. "끝은 정말 여기인가, 아니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만약 그 벼랑 끝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순간은 '희망'이라 불릴 것이다. 하지만 등을 돌린 채 주저앉아버린다면, 그 선택은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겁게 눌러오는 ‘절망’으로 남게 된다. 잡초는 피어난 자리에서 스스로 생을 증명하듯, 우리도 각자의 바람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것이 비록 고단한 길이라 해도, 진정한 자유는 언제나 험한 흙길 끝에서 피어나기에.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의문에 대해서 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흐른다면 그때는 지금 이 감정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열병 같은 것이라는 것을 구별하게 되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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