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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복수

by 김프로

늦은 밤에 초인종이 울린다. 나가보니 경비아저씨와 낯익은 아랫집 아주머니가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다. 경비 아저씨가 나서서 아주머니가 차를 돌리려다가 내 차 앞 범퍼를 받았다며 확인해 보라 한다. 오래된 아파트라 지하 주차장이 없다. 지상 주차장이 부족해서 늦은 밤에는 차량이 가득하고 주차장이 막다른 곳이라 늦은 밤에 차를 돌리기는 쉽지 않다. 플래시를 꺼내 들고 내려가서 차량을 살펴보니 범퍼 상태는 멀쩡한데 범퍼 모서리와 헤드라이트 유리에 약간의 스크레치가 보인다. 수리가 필요하면 비용을 알려달라고 아주머니가 어렵게 이야기한다. 내일 해가 뜨면 자세히 확인해 보고 연락하겠다고 돌아섰다. 아침에 확인해 보니 밤에 본 것과 다름이 없다. 마음속에 뿔 달린 놈과 날개 날린 놈이 논쟁을 시작한다.


: "찬스다. 반대쪽 범퍼에도 원래 스크래치가 있었는데 이 기회에 범퍼 새로 싹 갈아보자"

날개: "뭔 이런 정도로 수리를 하나? 범퍼는 스크래치가 있는 게 정상이라고 떠들고 다니지 않았나? 맘 좋게 그냥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한데"

: "아랫집이 이사 오자 마자 시끄럽다며 세 번씩이나 올라온 거 기억 안 나? 두 번은 TV 소리 시끄럽다고 하고 세 번째는 소머즈 청력을 지녔는지 우리 집 위층에서 불던 색소폰 소리 시끄럽다며 올라왔었지. 스트레스받아서 두고 보자 했잖아. 복수의 기회가 제대로 온 거여"

날개: "TV 소리는 네가 5.1 채널인가 뭔가로 우퍼를 울려대서 온 거지. 딸이 고3이라며 이해해 달라고 진짜 예의 바르게 부탁하는 조로 얘기했잖아. 세 번째는 사실을 알고 몹시 미안해했고. 보면 알잖아 착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너도 착한 놈이잖아"


마지막 문장으로 날개가 이겼다. "범퍼가 살짝 스크레치가 난 것이라 수리 없이 그냥 사용해도 될 듯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문자를 보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 쓰시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답신이 왔다. 그래, 난 좋은 놈이다.


다음날 저녁에 초인종이 또 울린다. 나가보니 아랫집 아저씨가 보자기에 싸인 과일 두 박스를 들고 서 있다. 죄송해서 가져왔단다. 수리할 필요 없어서 그런 거니 괜찮다며 극구 사양을 하는데 차주가 무조건 전달해 드리라 했다며 떠안기고 계단을 총총 내려간다. 과일 박스를 들고 들어오는데 갑자기 복수가 제대로 완성되었다는 통쾌함이 올라온다. 잠깐동안 바다 너머 섬나라에 대한 복수도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대인배가 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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