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극곰 Oct 05. 2024

같이 걸을까?

이젠 인정하려 해 

 갑작스러운 제안에 최고의 핑계를 찾아 얼버무리며 대답한다. 

"아까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발등도 많이 부었고 걸음이 느려. 두 사람이 답답할지도 몰라. 그냥 우리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건 어떨까?" 


"부에노.(좋아.)" 


 두 사람은 살짝 실망한 눈치였지만 같은 알베르게에 머무르자는 나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다시 한번 걸며 약속을 하고 잠이 들었다. 


"아란! 일어날 시간이야." 


"아란, 무슨 잠을 그렇게 곤히 자?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야 말이지."


 비몽사몽 눈을 뜨니 키캐는 내 얼굴 앞에 손바닥을 흔들며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크리스티앙은 방금 샤워를 마쳤는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새벽 5시 반, 함께 아침을 먹고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알베르게를 나서는데 크리스티앙이 내 등 뒤에 대고 말한다.  


 "아란, 오이 폰페라다.(오늘은 폰페라다까지!)"

  굴 따러 간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이 바로 이런 표정이었을까? 뒤를 돌아보니 어린아이와 같던 천진난만한 표정은 없어지고 사뭇 걱정스러우면서도 근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노 프로블레마. (문제없지), 아스따 루에고."  


 한마디를 남기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새벽공기가 차갑게 가슴에 들어왔지만 순수하기만 한 두 사람 덕분에 차갑던 공기가 사뭇 따뜻하게 느껴졌고 마음은 발걸음과 달리 가볍기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작은 언덕에 나무로 된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서니 십자가 주변에는 조가비, 사진, 신발, 돌, 엽서, 모자, 등등 폰세바돈을 떠나는 순례자들의 흔적이 깃들어있었다. 폰세바돈이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순례자들이 물건을 하나씩 두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순례자들처럼 폰세바돈이 조금이나마 외롭고 쓸쓸하지 않도록 골웨이 집에서 가져온 빨래집게와 천 원짜리 한 장을 놓고 언덕에 올라서서 뒤돌아 마을을 바라보는데 쓸쓸함이 느껴져 코 끝이 찡해졌다.  


"올라! 아란!! 롱 타임 노 씨. 부엔까미노."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하는 크리스티앙. 그의 표정과 장난스러운 농담은 항상 날 미소 짓게 한다. 


"이건 뭐야?"  

"한국 돈이야. 내가 이 마을에 줄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네. 이 마을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버려진 마을이라는 별명보다 더 좋은 별명이 생기면 더 좋고."


"너 울어?" 

"아니. 안울어. 그냥 마을이 조금 쓸쓸해 보여서." 


 두 사람도 내 옆에 서서 마을을 한 번 바라보다가 폰세바돈이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작은 돌을 주워 탑을 쌓았다. 두 사람의 온기가 폰세바돈에 닿기를. 나에게 그랬듯이.   그들이 다른 순례자와 이야기하는 사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적막한 붉게 물든 새벽하늘을 보 산등성이를 따라 폰페라다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폰페라다를 향하여 걷는 길은 상당히 아름다웠고 잠시 멈추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감상한다. 멀찍이 보이는 산자락이 탁 트인 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었고, 살짝 따스한 바람까지 완벽하게 불어왔다. 자연이 주는 선물에 황홀함을 느끼며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다가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픔보다 창피함이 밀려왔고 가방이 무거워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파도 창피해도 인생은 계속되는 법이다. 얼른 털고 일어서 걷는 자가 승자다. 바지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 폰페라다에 도착했다.  


 폰페라다 큰 마을이기는 하지만 200여 명의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알베르게가 하나밖에 없다. 늦게 도착한 순례자들은 마당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자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일찍 도착한 나는 침대를 배정받고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배낭을 세워놓고 차례가 될 때까지 알베르게 마당에 있는 작은 분수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찬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두 사람이 상당히 귀엽고 고마웠다. 


"아란! 우리 4km나 더 돌아서 왔지 뭐야." 


 크리스티앙은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푸념을 늘어놓았고 그의 투정에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나왔는데 자꾸 그들이 신경이 쓰인다. 아침에도 그들이 어디까지 왔나 뒤돌아보았고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폰페라다의 건축물을 구경하고, 내일 먹을 빵과 물을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마당은 한적했고 순례자들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어제 그랬던 것처럼 바르셀로나에서 온 아저씨들과 발을 담그고 수다를 떨었다. 


 경찰 출신 아저씨가 다른 아저씨에게 ' 꼬레아나, 모래노, 블랑코' 스페인어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3개 단어는 확실하게 들렸다.  


"뭐라고요? 왜 한국사람들은 피부가 하얀 편인데 왜 저는 구릿빛이냐고요?" 


영어로 되물으니 두 명의 아저씨들이 놀래서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아란! 그걸 어떻게 알아들었어?"


 언어도 기세고, 눈치지만 몇 주 전 스페인 할아버지가 스파르타로 가르쳐주신 단어라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단어였다. 


"2주 전인가? 스페인 할아버지가 알려주셨어요. 하하."

 

 통유리로 되어있는 공용주방에서 우리의 모습을 본 크리스티앙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스페인 경찰아저씨에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두 사람은 스페인어로 이야기했고,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모래노, 치카, 블랑코, 꼬레아나' 뿐이었다. 크리스티앙은 그 말을 듣더니 웃음을 터트렸고 무언가 말을 거들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주방에서 들려오는 전자레인지 띵! 소리에 잰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한바탕 웃고 분수에서 나왔다. 경찰아저씨는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물과 과일, 빵을 냉장고에 넣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앞 테이블에는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피자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마음속에 있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크리스티앙, 키캐." 

"디메(말해)" 

"기회가 지나가버렸을지도 모르겠는데 내일부터 같이 걸을 수 있을까? 나는 두 사람보다 비록 걸음이 느리지만 함께 걷고 싶어. " 


 하루종일 두 사람이 어디쯤 오나 뒤를 돌아보았던 나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제법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마음의 수문을 개방한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흘러가는 대로 마음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폰세바돈. 외로운 마을. 
폰세바돈을 뒤로하고 
크리스티앙, 키캐와 새벽길 
자연이 주는 선물 
폰페라다 가는길 독일인 아주머니와 


폰페라다에서 만난 두사람 
미니분수에서 경찰아저씨들과 


작가의 이전글 버려진 마을 폰세바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