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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Oct 25. 2024

자연과의 대화

자연이 우리를 응원해  

 키캐는 어디서 주워온 나무 지팡이를 왼손에 단단히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생기 넘치는 얼굴과 경쾌한 발걸음은 마치 산티아고가 런웨이로 변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키캐와 달리 나는 어제 무리한 탓인지 발걸음이 무거웠고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던 찰나, 키캐가 쓱 뒤돌아보며 나에게 말을 건넨 뒤 다시 한번 거침없이 전진한다.


"아란, 드링크 워터."


 키캐는 어느새 점이 되어 보이지 않았고, 그 뒤를 절뚝이며 따라 걷는 나를 위해 크리스티앙은 오늘도 나의 속도에 맞춰 발걸음을 늦춘다. 눈치를 보며 크리스티앙에게 말했다. 


"크리스티앙, 키캐가 혼자 걷고 있잖아. 나는 괜찮으니까 키캐랑 같이 걷는 게 어때?"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파울로코엘료 책에서 읽은 구절을 그의 밝은 목소리로 읊어주었다.


"천천히 걷고, 주위를 바라보며, 온전히 느끼며 걸으라고 했어. 오해하지 마. 난 지금 자연을 즐기며 내 방식대로 걷고 있는 중이니까."


 그의 장난스러운 말속에는 따뜻한 진심이 담겨있었고 그의 온기가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걸었고 바람이 나뭇잎을 살며시 흔드는 소리가 고요한 침묵을 깨웠다.


"아란 들려?"

"응? 뭐가?"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

"뭐라고 했는데?"  

"'부엔 까미노'라고 했어. 너의 길을 응원한대. 나도 너의 오늘을 응원해."


 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고 나도 그의 미소를 따라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거대한 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눈에 봐도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듯, 둘레가 8.5미터, 높이가 2.7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밤나무였다. 800년을 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린 그 모습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고 그 앞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이 들었다.


 우리 셋은 밤나무의 웅장함에 감탄하여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800년의 세월을 품고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크리스티앙은 한걸음 내딛고 양팔을 벌려 나무를 품에 안으려는 듯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최선을 다해 두 팔을 벌려 나무를 품에 안았지만 그 모습은 거대한 나무에 비해 아주 작은 매미처럼 보였다. 자연의 위대함과 앞에서는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무에 귀를 대고 잠시 눈을 감았고 마치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듯했고 키캐와 나는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그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늘색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키캐, 아란! 나무가 너희들과 이야기하고 싶대."  


 나무가 말을 할리는 없지만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별한 힘이 있다. 그가 입을 열면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된다.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키캐와 나는 커다란 나무에 다가갔다. 그때 뒤에서 크리스티앙이 우리에게 소리친다.


"키캐! 아란! 나무를 꼭 안아줘. 그리고 나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봐."  


 키캐와 나는 어리둥절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었고 우리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키캐와 나는 햇살이 우리를 감싸 안듯이 두 팔을 벌려 포근하게 나무를 껴안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거칠고 커다란 나무가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바쁘게 돌아가는 잿빛 세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아가곤 한다. 어쩌면 크리스티앙은 우리에게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감사함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작지만 특별한 것들을 보고 느끼는 능력을 지닌 듯했다.


 먹고사니즘. 바쁜 일상으로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며 살아왔던 내 모습을 한번 더 되돌아보았다. 크리스티앙의 눈을 안경 삼아 바라본 세상은 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아란! 나무가 뭐라고 해?"

"부엔까미노. 너의 길을 응원한대. 우리의 길을 응원한대." 한 시간 전 그 말이 내 입술을 통하여 다시 그에게 되돌아갔다.  다시 한번 스페인의 강렬한 햇살이 내 피부를 감싸고 나뭇가지 사이로 따스하게 빛이 스며들었다. 살짝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카락을 흔들어놓았다. 나무도 나뭇잎을 흔들며 우리의 카미노를 응원해 주는 듯했다.


 그의 응원 덕분에 오늘의 내가 더욱더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걷다가 스페인 작은 마을 트리아까스텔라에 도착했다. 손빨래의 수고를 내일로 미루고 세탁기에 편리함에 기대어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이른 오후, 우리는 시내로 점심을 먹으러 길을 나섰다. 키캐는 생선요리를, 크리스티앙과 나는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시원한 생맥주를 한잔씩 기울이며 하루의 피로를 날려버리기로 했다.  


"살룻!(건배)."


 함께 잔을 부딪히는 이 두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그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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