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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Nov 08. 2024

맥주내기

선택 

  어느덧, 두 사람과 나란히 걷는 일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친구라고 하기엔 가까운 듯하고,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한 발짝 멀게 느껴지는 두 사람. 우리는 서로의 걸음에 맞춰 함께 걷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각 지역마다 저마다의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바스크지방은 스위스의 풍경을 연상시키고, 다른 지역은 스페인 특유의 주황색 지붕들이 시선을 사로잡기도 한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우리나라 제주도와 아일랜드처럼 드넓은 초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갈리시아의 넓은 초원과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아일랜드 추억에 잠겼다. 그리운 마음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캐는 먼저 앞서 가고 크리스티앙이 내 옆에 와서 조용히 물었다. 


"왓 해픈? 어디 아파?" 

"Nada(나다), 아무것도. 그냥 여기 풍경이 아일랜드랑 많이 닮아있어서..."

"아란, 너는 어디가 더 좋아?"  

"나는 아직까지는 아일랜드가 더 좋아. 나중에 너희들도 분명 골웨이를 좋아할 거야."

"우리가 골웨이에 가기 전 네가 먼저 발렌시아에 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 

"클라로(물론이지)."  


 크리스티앙과 이야기하며 걷고 있는데 앞서 가던 키캐가 크리스티앙과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크리스티앙, 아란. 이것 봐봐." 

"이게 뭐야?" 

"우리 이 여정도 100km밖에 남지 않았어." 


키캐가 가리킨 곳에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100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 주변에는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간 순례자들이 남긴 작은 흔적들이 비석 주위에 놓여 흩어져 있었고 많은 이들이 발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으며 산티아고 여정을 기념하고 있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다시 산티아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 뒤, 나는 비석의 표면을 더듬어 보았다. 그 순간 700킬로를 걸으면서 함께한 많은 순례자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순간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800km의 긴 여정이 어느덧 반환점을 지나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그곳에서 과연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겨우 100킬로밖에 남지 않은 길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짙어졌다. 



 우리도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길을 나섰다. 포르투마린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과 함께 예약한 사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알베르게에서 쉬고 나는 마을 구경을 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오며 가며 인사한 영국커플도 만나고, 이탈리아 친구 오리오도 오랜만에 만났다. 영국커플은 포르투마린에서 알베르게를 찾지 못해 속상해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4킬로 더 간다고 했다. 


"아란, 어디 알베르게에 있어? 어휴.. 사리아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단체 순례자들 때문에 알베르게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야.


"맞아. 나도 들었어. 키캐가 어제 알베르게를 예약해 줘서 저기 알베르게에서 묵고 있어. 너는?"


"아 그렇구나. 나는 여기에서 묵기로 했어."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알베르게가 아닌 넓은 체육관이었다. 그는 멋쩍게 웃고 있었고 자신의 보금자리를 보여주겠다며 나를 체육관으로 안내했다.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순례자들이 매트에 침낭을 펼쳐놓고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비도 곧 쏟아질 것 같고 다음 마을까지 가는 건 무리더라고." 


오리오가 덧붙였다.  


"아! 맞다. 북아일랜드 출신 3인방이랑 스페인 바스크 신혼부부랑 26일에 산티아고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대. 어제 레이레랑 개리를 만났는데 네 얘기를 하더라. 못 본 지 꽤 됐다면서.. 산티아고 떠나기 전에 한 번 볼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치?" 


 예상치 못한 소식에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있었다. 한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 잊고 있었던 이름들, 만나고 헤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그들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오리오와 헤어진 뒤 천천히 알베르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베르게에 들어오니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나의 빨래를 개고 있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알베르게에 들어서자 크리스티앙이 나를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왓 해픈? 아란?" 

"나다.(Nada.)"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디메(Dime), 말해봐."


키캐의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앙, 키캐. 나는.. 내일 멜리데까지 가야 할 것 같아. 전에 알던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26일에 산티아고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대. 예상대로라면 우리는 27일에 산티아고에 도착할 텐데.. 그럼 이미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없을 거야.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그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라." 


"아란, 여기서 멜리데까지는 45km야. 그걸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키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키캐, 너도 알다시피 나는 꽤 강한 편이잖아. 전에 47킬로미터도 걸은 본 적도 있어서 이 정도쯤은 문제없을 것 같아." 


 크리스티앙은 키캐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키캐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키캐가 크리스티앙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크리스티앙은 우리와는 달리 밝은 미소를 지으며 웃음을 터트리며 내 옆으로 온다.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그는 내 발등을 보며 말했다. 


"하하하하하.. 아란, 너 발 상태로는 무리야. 지금 20킬로, 3킬로만 가도 아파서 절뚝거리는데 45킬로를 어떻게 가려고?" 


"..." 


"네가 진짜 여기서 멜리데까지 걸어가면 내가 맥주를 살게. 만약 그렇게 못하면 네가 맥주를 사는 거야.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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