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청세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라는 이름의 청소년 인문 토론의 장입니다. 정세청세는 청소년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민주 시민으로 성장하길 꿈꿉니다. 2019년 현재까지 36개 지역에서 2만 4천 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참여했으며, 올해 정세청세에서는 “삶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이라는 주제로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있습니다.
정세청세 브런치 여덟 번째 글은 정세청세 청년 총괄기획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주안 님이 인디고 서원이 개최한 인문학 콘서트 <Where Hope Begins - 공존, 공감, 공생의 삶을 위하여> 에 참여하여 보고 느낀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흔히 매직 아워라고 부르는 시간 있습니다. 하늘이 다양한 빛을 띄는 해질녘입니다. 가을 노을은 어쩐지 다른 때보다 더 고요하고 아름다워서 저는 종종 늦은 오후를 기다리곤 합니다. 어느 날은 석양 반대편에서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바다를 보게 되었는데요. 하얗고 파란 하늘이 어둠에 잠겨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저는 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 아름다운 순간은 붙잡으려는 찰나 아득히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저는 무언가에 쫓기듯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고등학생 때는 졸업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 알았습니다. 더는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고,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것들을 미루지 않아도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갔던 때도, 재수를 결심하고 다시 공부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단순히 고등학생을 벗어난다고 해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한 인간으로 오롯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요.
그런 제가 ‘한 인간으로 오롯이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해주었던 이들을 만났습니다. 그전에 저와 제 동생에 대한 소개를 드리고자 합니다. 올해 20살인 저는 현재 정세청세 총괄기획팀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재수생이기도 합니다. 정세청세 활동을 하며 정의와 희망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도 다시 집에 돌아와선 <수능특강> 문제집을 푸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말 무언가를 알고 저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는 저를 볼 때면 정세청세를 할 때의 저와는 달리 영혼이 잠들어 버린 채 의심과 불안감, 괴리감에 빠지곤 합니다. 그럴 때 저의 몸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런 경직이 심해져 갈 무렵이었는데요. 인디고 서원에서 개최하는 인문학 콘서트 “Where Hope Begins – 공존, 공감, 공생의 삶을 위하여”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콘서트에 동생과 꼭 함께 오고 싶었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 제 동생은 저와는 달리 마음의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데요. 장난이 많긴 하지만 착한 아이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말도 잘 건네며 어울리길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학교에서는 왕따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알지 못하지만, 점차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얼굴이 어두워지는 동생의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얼굴에 그늘이 생기고, 저처럼 몸이 굳어가는 동생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막막함이 차올랐습니다. 동생이 콘서트를 좋아할지 알 수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생의 손을 잡고 콘서트장에 갔습니다. 저와 제 동생 모두 반복되는 지친 일상에서 기쁨과 희망이 필요했던 때였습니다.
이번 콘서트의 주인공은 콜롬비아에서 춤을 통해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몸의 학교’를 세운 교장 선생님인 알바로 레스트레포 선생님과 그의 학생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스트릿댄서 중 한 명으로 미국 내에서 차별을 없애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릴 벅이 왔습니다. 이야기만으로 가슴이 뛰었고,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엔 알바로 레스트레포 선생님의 강연으로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영어로 강연이 시작되니 갑자기 시무룩해지면서 지루해했는데요. 그런 모습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웃고 있을 사이도 없이 저는 강연에 집중을 해야 했는데요. 알바로 레스트레포 선생님은 바로 지금 제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정확히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그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승리자와 패배자로 갈라지는 것이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학교에 가는 것은 어떤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열정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학교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추구할만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해서 학교에 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제 관점에서 그것은 쓸모없는 교육입니다. 교육은 반드시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알바로 레스트레포 선생님은 우리가 교육을 받는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서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궁극적으로 교육의 이유는 ‘자기실현’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내내 제가 진정으로 바랐던 교육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자기실현으로서 교육’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연에서 ‘몸의 학교’ 학생들이 나와서 공연을 펼쳤는데요. 보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단순히 춤을 잘 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미 춤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고, 춤을 통해 말하고 춤을 통해서 자기 내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냥 굳어 있고 공부하는 자리에 앉아만 있는 제 몸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제 동생은 몸의 학교 학생들이 춤을 출 때부터 공연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요. 이후 이어진 릴 벅의 공연에는 아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제 기억에 이 아이가 이토록 뭔가 집중해서 한 적이 언제였는지를 되짚을 만큼 몰입하고 있었는데요. 저 또한 릴 벅의 아름다운 춤을 보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왜 처음 만난 낯선 댄서의 춤이 이토록 감동적일까를 생각했는데요. 그것이 공연 이후에 이어진 질의응답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릴 벅은 말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 중 하나는 제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가난하게 자랐다는 것입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 같은 경우도 가난하고 어려운 곳이었는데요. 많은 사람이 저에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야. 너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거야. 너의 미래엔 희망이란 없어”라고 말을 했습니다. 무서운 갱단이 있었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등 나쁜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희망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던 그런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또한 저는 어려서 왕따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저렇게 멋지고 밝은 릴 벅을 보면서 그가 그런 아픈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무척 충격이었습니다. 저도 동생도 놀란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어둠이 있었던 것이지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시절에 릴 벅의 꿈은 ‘백댄서’가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저에게는 하나의 작은 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백댄서가 되고 싶다는 작은 꿈을 가지고 집중했고 연습했습니다. 매일매일 낮밤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는데요. 그런 과정에서 발톱이 빠지기도 하고 발에 피가 흥건히 젖기도 했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고의 백댄서가 되고 싶었으며, 누구보다도 강렬히 그렇게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제 삶을 바꾸고 싶었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으며, 그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오늘 릴 벅을 처음 알았지만, 릴 벅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건 저뿐만 아니라 동생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릴 벅은 개인적인 성취뿐만 아니라 더 많은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 위하여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 춤 학교를 세우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때론 너무도 어둡기에 희망을 품는 것이 가끔은 두려워지곤 하였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알바로 레스트레포 선생님과 릴 벅이 준 희망의 물결은 쉽게 잠잠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기력하고 비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저라도 다시 한번 툴툴 털어내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희망하는 하루를 꿈꾸며 나아가보고 싶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희망은 단지 나에게 있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그 이유가 사랑하는 연인과의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일 수도 있고, 학생의 경우에는 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희망을 품을 때 정해져 있는 모습은 없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번에 동생과 함께하면서 나 혼자만의 희망이 아니라 모두가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새로운 질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주 빛나지 않더라도, 큰마음이 아니라도 누군가와 함께 희망을 노래할 수 있고, 춤으로 표현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제 삶에도 더 좋은 순간이 분명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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