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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 Feb 20. 2022

한국에서 살며

이탈리아어 공부에 대한 회상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탈리아의 생활이 끝났다. 비록 4년이라는 정해진 기간을 두고 이탈리아로 향했지만 이탈리아에서의 삶은 뭔가 영원할 것만 같았다. 끝이 있었지만 끝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만만치만은 않았다. 일단 언어의 장벽이 매우 컸다. 사람들은 영어로 질문하는 나의 전화통화를 무시하고 끊어버리기 일쑤였고, 나의 부족한 이탈리아어 실력을 살짝 비웃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탈리아에서는 공과료를 Tabacchi(담배가게)에서 주로 내는데, 기본적으로 타바키에서는 영어를 못하므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이탈리아어 문장을 몇 번씩 되뇌기도 했다.


이탈리아어로 아주 조금은 말할 수 있었던 시기는 다름 아닌 1년이 지나서였다. 일을 해야 하다 보니 이탈리아어를 학습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있었고, 업무를 대부분 한국어로 하는 상황에다 퇴근하면 이탈리아 슈퍼에서 산 값싸고 맛있는 와인이 내 머릿속을 느슨하게 만들다 보니 이탈리아어 학습은 지지부진했다.


사실 이탈리아어 문법은 대략 이탈리아어 거주 2년 정도가 되어서 완성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코로나가 터진 2020년부터는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어를 접할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코로나가 터진 2020년 3월부터 4월 말까지는 동네 슈퍼와 약국을 제외하고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자술서를 지참하고 슈퍼로 장 보러 가는 시간만이 하루 중 유일한 낙이었다. 집에 있으면서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이탈리아어를 다시금 공부하게 되었고, 이탈리아어 영화나 드라마도 꽤나 챙겨보게 되었다.


그러고 어느 정도 격리가 풀린 2020년 6월부터는, 이탈리아에 거주하기 시작한 3년 차 여름부터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조금씩 이탈리아어로 이야기하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자기 동네 자랑거리도 끄덕거리며 알아듣는 척을 할 수 있었다.


바리에 놀러 가서 이탈리아 의사와 미진씨 커플을 만나서 저녁 먹으며 이탈리아어로만 이것저것 이야기했던 기억, 알베로벨로에서 모델 같은 아내와 함께 여행 중인 앙코나 출신 IT 엔지니어와 만나 유벤투스와 페라리에 대해서 이탈리아어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물론 말하는 쪽은 그들이었지만 그래도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그리고 2020년 겨울, 2차 팬더믹이 진행되자 또다시 장기간의 재택근무가 시작되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슈퍼마켓과 약국과 더불어 '서점'도 문을 열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탈리아어 책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 읽을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는 주제라면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특히 중고서적 코너인 Libraccio에서 옛날 서적을 비교적 싼 값에 구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이탈리아어 책은 미술, 음악, 조각, 축구, 자전거, 그리스 신화, 역사, 각 도시의 역사, gialli(추리소설), 역사소설 등등 가리지 않고 구매했다. 특히 audiable로 들을 수 있는 책이라면 고민하지 않고 구매했다. 외출을 할 때마다 15유로는 책값으로 쓴다고 생각하며 집 뒤에 있는 꽤 규모가 있었던 Fetrinelli에서 책을 사고 또 샀다. 사면서 이탈리아의 출판문화와 다양한 출판사들에 대해서 알게 되기도 했다.


인상을 끄는 출판사는 전문 인문서적으로 유명한 Adelphi, 다양한 소설책 라인업을 보유한 Einaudi, 시칠리아에 위치하면서 다양한 추리소설을 출간하는 Sellerio editore Palermo 였는데 이 출판사들의 책은 멀리에서도 구분이 갈 정도로 매우 역사가 깊은 디자인을 간직하고 있었다.


Einaudi의 책들. 검은 글씨는 작가를, 붉은 글씨는 책의 제목을 나타내는 통일성을 갖춘다.


Sellerio Editore Palermo의 책들. 대체로 문고판으로 나오며 Tascabile(휴대할 수 있는)하면서도 아름답다.


Adelphi의 책. 동일한 형태의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책의 표지 색상을 다르게 하는 게 특징이다.


지금까지 구매한 이탈리아어 책은 200여 권이 되는 듯하다. 그중 완독 한 것은 어린이 책까지 포함하면 30권 정도 되지만 어린이 책을 제외하면 대략 6~7권 정도 되는 듯하다. 책을 읽을 때는 사실 이탈리아어 실력이 는다는 생각이 잘 안 든다. 워낙 모르는 단어도 많고, 찾았던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 지도 헛갈리기 때문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또한 네이버 이탈리아어 사전은 유용하게 썼지만 너무 내용이 부실했고, 외대에서 편찬한 이탈리아어 사전은 내용은 충실한 편이지만 사전의 특성상 간편하지 않았다. 네이버 사전은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내용이 매우 부실하다. 그래서 일단 네이버에서 찾아보고 없으면 외대 사전이나 옥스퍼드 영-이 사전을 찾아보기도 했다. 영어교재는 한국에 차고 넘치지만 이탈리아어 교재는 사실 없다시피 한 실정이니 영어에 비해서 더 고생스러운 길임에는 틀림없다.


피렌체 바버샵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와인도 마시면서 어영부영 시간도 보내고, 영화도 보고, 식당도 예약하고 등등 삶을 살아가다 보니 4년 차 마지막 즈음에는 이탈리아 사람들하고 간단한 이야기들은 그나마 편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원래 이탈리아 사람들은 푼수끼가 넘치다 보니 뭐 간단한 것을 물어보면 열변을 쏟아내는지라 내가 이탈리아어를 잘 못하더라도 대화가 그리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언어 공부라는 것은 그 언어를 내가 사용할 환경에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아울러 내가 그 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의지도 중요하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 속에서도 발전이 더디다고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언어 머리는 타고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보니 그렇지 않았다. 언어를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새롭게 접근하려는 노력을 갖춘 사람만이 결국 성공하는 것이 언어 공부가 아닐까 한다. 내가 이탈리아어를 잘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금은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머릿속에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느낌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탈리아어로 읽고 나서 한국어로 읽는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어로 Enea(에네아)로만 생각하다 보니 너무 생소하게 들리기도 했다. 또는 셰익스피어의 겨울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여 주인공의 이름이 한국어로 페르디타 라 쓰여있는 것이 쉽게 다가왔다. Perdita는 이탈리아어로 잃어버린 이라는 뜻이기에 (perdere : 잃어버리다) 셰익스피어가 의도적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탈리아어를 몰랐다면 아직도 페르디타에 밑줄 그으며 공책에 끼적이며 암기하려 노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나보다 더 많은 이탈리아어 원서를 보유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조금만 더 책을 열심히 읽는다면 누구보다도 재미있는 이탈리아와 서양세계의 이야길 풀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는 것이다. 글로 돈을 벌면 좋겠지만 그것은 순전 자신의 천부적 재능에 달린 문제고, 그보다는 좀 더 수월한, 즉, 누군가에게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유익한 시간을 선사할 수만 있다면 그만큼 보람된 취미활동도 없지 않을까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아직도 이탈리아어로 된 책들을 읽고 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많은 수의 이탈리아어 책들이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수준에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를 선사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이탈리아에서의 삶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전하는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탈리아어는 꾸준히 공부할 생각이다.


한국에서 알게 모르게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며 좌절하며 성장하는 많은 분들에게 위로가 되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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