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걷는다 (9)
갑자기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요동치는 때가 있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일출이 보고 싶어졌다. 밤에 출발해서 새벽 정동진의 일출을 볼 수 있는 기차가 분명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관련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꽤 예전에 사라진 거였다. 제일 빠른 기차여도 새벽 7시 몇 분 기차. 이렇게 되면 하룻밤을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는데. 집이 좋은 백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 집 나가면 개고생인데...'
뚜벅이였기에 더더욱 고민을 하다가, 내일이 되면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미리 표를 사지 말고 서울역으로 가서 구입하자. 나는 분명 MBTI에서 PRETTY가 아니라, J로 끝나는 판단형인데 이럴 때 보면 P 인식형 같단 말이지.
결국 기차를 타고 오후의 정동진을 만났다. 그런데 정동진으로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서울에서 정동진까지 걸리는 시간은 두 시간. 한 시간 정도를 입석으로 갔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의 시작이었다.
정동진으로 왜 갔냐고 물으신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보통 시련을 많이 당하면 제일 보고 싶은 게 바다라던데. 시련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백수의 삶은 파도가 치듯 순환적으로 흘러간다. 물론 아주 큰 태풍이 오고 난 후니까 상황이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직장인이 겪는 매일의 시련이 백수에게는 없다. 눈칫밥도 없고, 퇴근각 또는 퇴사각 잴 필요도 없고 타인에게서 느끼는 스트레스도 평균적으로 덜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모임이 생기면 골치가 아프다. 타인들과 부대껴야 하는 모임은 백수에게 시련이다. 자기소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모임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
연차는 적지만 횟수로 따지면 동년배들보다 많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모임은 바다를 보고 싶게 한다. 그래서 정동진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으음. 바다.
정동진이라고 쓰여있는 간판 앞에서 사진 남기고 싶은데 찍어줄 사람이 없다. 정동진역은 작지만 파스텔톤의 간판으로 나 좀 귀엽지, 하는 것 같았다. 귀여웠다. 그 앞에서도 사진 찍고 싶은데 찍어줄 사람이 없다. 백수는 어딜 가나 외롭다. 카메라를 들어 멀리 있는 배들이나 찍어 보았다. 배는 좋겠다. 사진 찍어줄 사람이 있어서.
모임에 대한 주제로 돌아가 보자. 사실 요즘 뭐하고 지내? 라는 질문에 나 요즘 백수야, 라고 말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사람들 반응을 보는 게 은근 재미지다. 초반에는 정말 쪽팔린다고 생각했는데 직장인이 되었다가 백수가 되어보니까 이게 부러운 거였다. 부러운 것도 그냥 부러운 것도 아니고 나는 못 하는 걸 얘는 하고 있네, 가 되니까 어깨가 들썩거리기도 한다. 직장인들 앞에서 의외의 자랑거리가 되어준다. 슬프긴 한데 아무튼 당당해져도 되는 거다. 백수가 뭐 어때서. 당당해야지 백수 인생. 집 값이 많이 올라서 백수 인생 길게는 못 하니까.
택시를 타고 가기보다 무작정 걷는 걸 택했다. 뚜벅이의 숙명이기도 하다. 걷는 여행이 또 그만큼 묘미도 있다. 수많은 해산물 집 가운데 한 우동집을 발견했다. 정동진에서 우동이라니. 마음에 들었다. 그 우동집은 조금 큰 횟집 빌딩 바로 옆에 당당하게 자리해 있었다. 그 당당함도 보기 좋았다.
해물 우동을 주문했다. 큰 기대 없이 호로록 먹었는데, 와 맛있다. 당당한 이유가 있었구먼. 당당해지기 전에 단단해져야 함을 통째로 든 게를 건드리며 깨달았다.
"그 게, 바로 요 앞에서 잡았어요. 국내산이에요."
사장님의 단단한 내공을 읽었다. 백수는 이렇게 한 수 배워갑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