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좀 읽는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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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독서모임은 그렇게 즐겁지도 유익하지도 않았고 지원금으로 맛있는 걸 사 먹지도 못했지만 그다음 학기에 나는 또다시 독서모임을 신청했다. 한 번 해봤으니 더 잘해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인원을 반 이상 확 줄였다. 4명이 모였고 이전의 모임보단 좀 더 책에 관심 있는, 관심을 가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었다. 인원을 줄였을 뿐 아니라 읽고 의논할 책을 고르는 과정도 함께 가졌다. 여러 의견이 오갔고 우리가 선택한 주제는 영화화된 고전이었다. 그렇게 세 권의 소설, 『오만과 편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시계태엽 오렌지』를 읽게 되었다.
우리는 책과 함께 각각 <오만과 편견>, <괴테>, <시계태엽 오렌지>, 영화까지 보고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각자 궁금한 점이나 얘기하고 싶은 점을 미리 공유하고 답변을 어느 정도 준비해 만났다. 책과 영화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았는지부터 무엇이 달랐는지에 대한 비교, 각색의 방향성과 같이 영화와 책을 함께 다룬 내용이 많았다. 그 외에 책 내용 자체에 대한 논제도 많았지만 책을 고른 주제가 '영화화된 고전'이다 보니 영화화를 주제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훗날 이 내용을 활용해 과제에 써먹기도 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함께 읽고 본 것들이 다 좋긴 했지만 소설에서는 『오만과 편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시계태엽 오렌지』 순으로 좋았고 영화를 보았을 때는<시계태엽 오렌지>, <괴테>, <오만과 편견> 으로 책과 역순으로 좋았다. 같은 내용의 콘텐츠인데 누가 어떻게 만들었냐에 따라 그 감상이 달라진다는 점이 재밌었다. 콘텐츠의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이번에는 각자의 책을 사고도 지원금이 꽤 남았으므로 우리는 모임을 하며 음료와 간식을 사 와 먹기도 했고 당시에는 고급으로 느껴진 비싼 고깃집에 가서 배부르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 지원금을 탈탈 털어 쓸 수 있었다. 한 번의 실패에서 배운 것들이 있었기에 여러 방면으로 다음 독서모임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즐거웠던 경험 덕분일까, 자연스레 난 휴학을 했던 2018년 1학기와 코로나로 학교를 가기 힘들었던 2020년 1학기를 제외하곤 모든 학기에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며 난 총 5번의 독서모임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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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독서모임에서 여러 책을 골라 읽었지만 대부분은 고전 소설, 그중에서도 세계 문학을 위주로 진행했다. 대학에서 지원해 주는 소모임이기에 선택의 폭이 약간은 정해져 있기도 했고 독서모임 프로그램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져 선정되지 못하는 팀도 생겼기에 고전을 선택하는 것은 꽤나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내가 모임을 통해 읽은 책들은 이렇다. 『1984』, 『화씨 451』, 『다섯째 아이』 , 『변신·시골의사』, 『롤리타』 여기에 앞서 언급한 세 권과 첫모임에서 읽은『피츠제럴드 단편선 2』도 고전 소설이니 독서모임을 하며 한 카테고리로 참 꾸준히 읽긴 했다. 여기에 아마 한두 권 정도 더 있었던 듯한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독서모임을 하며 작성했던 보고서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학교 홈페이지가 리뉴얼되어서인지 적어두었던 기록들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보고서를 아주 열심히 쓴 편은 아니었기에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의 기록을 보며 이때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구나, 이런 얘기를 했구나 하고 되돌아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니 만약 독서모임을 해보려 한다면 혹은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기록하고 있지 않다면 그 내용을 어딘가에, 기왕이면 그 내용이 유실될 일 없는 곳에 적어 보관해두길 바란다.
다시 고전 이야기로 돌아와서, 다소 불순한(?) 의도로 고전(세계 문학)을 선택하긴 했지만 이를 읽고 모임을 가지며 배운 것들은 분명히 있었다.
먼저 고전이라고 다 어렵고 지루한 것은 아니라는 점. 고전에 대한 고정관념이 분명히 있긴 하기에 겁나는 부분도 있었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 잘 읽히지 않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특히,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가진 『1984』나 『화씨 451』, 『시계태엽 오렌지』 같은 소설들은 그 세계에 푹 빠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저 우연인지 아니면 끼리끼리 모인 탓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호불호는 대부분 일치했다. 학기별로 구성원이 달랐음에도 그랬던 걸 보면 그냥 나와 친한 사람들의 성향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사람이 다 다르다 하지만, 내 주변에 나와 180도 다른 사람은 잘 없었다. 같이 독서모임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 이미 한 종족인 것이다.
두 번째는 처음의 배움과 정반대로, 고전이라고 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거나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고전이라는 것이 어느 시기이든 오랫동안 읽히는 책을 말하기에 그 내용이 훌륭하고 잘 쓰인 책이라 생각되는 게 보통이다. 물론 이 점은 어느 정도 사실이겠으나 훌륭하게 잘 쓰였다고 해서 내 취향에 반드시 부합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섯째 아이』나 『롤리타』의 경우는 공감이 잘 가지 않았고 읽기에 힘겨웠다. 문체 같은 문제보단(오히려 문장은 좋았다.) 소설의 내용 자체가 내게 버겁게 다가왔다. 거부감이 드는 내용이 있다거나 독서를 하면서 버텨야 하는 경우는 나와 잘 맞지 않았다.
함께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 취향에 맞는, 맞아 보이는 책들만 골라 읽었음으로 어떤 책이 나에게 잘 맞지 않는지는 어렴풋이,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독서모임을 하며 좋든 싫든 선정한 책은 읽어야 했기에 오히려 나의 취향을 더욱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마주쳐봐야 그게 정말 좋은지 싫은지, 왜 좋은지 왜 싫은지 알 수 있는 법이다.
대단히 많은 양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나름 고전의 맛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유식해진 느낌, 진짜(?) 대학생이 된 느낌도 조금 들어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학과 교수님들과의 진로 상담을 할 때도 고전을 읽은 얘기를 하며 칭찬을 유도하기도 했다. 지적 허영심이란 걸 마음껏 채워볼 수 있어 즐거웠고 지금도 그 당시 고전(을 읽는 나)에 취해 있던 시기가 부끄럽지는 않다.
20대 초중반에 이런 있어 보이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겉멋의 즐거움을 맛보았기 때문인지 지금은 독서모임에 고전을 잘 가지고 가지 않는다. 대신 '이런 책 처음 보지?' 하는 아무도 모르는 책을 자주 들고 가는 독서모임 홍대병에 걸려 버렸다. 나의 어떤 모습에 취해있든 책을 읽으면 됐지 싶다. 다음엔 또 어떤 나의 모습에 취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