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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윤여재 Sep 25. 2020

명동으로 출근합니다 -1

명동.  특별했던 곳이 일상이 되었다.

1- 아빠와 딸.     


명동으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일산에서 명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일상은 내 계획엔 없던 일이었다. 교사를 그만둔 후 근 20년 만의 출근이었다.    


첫날, 퇴근길에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다 무심코 길 건너를 보았을 때 백병원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턱 막혔다. 그리움과 슬픔이 교차했던 곳, 아빠가 수술 후 마지막으로 머무신 곳, 그리고 그 이후로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게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백병원.


살면서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상황이 발생할 때면 늘 생각을 한다. ‘주님께서 다 뜻하신 바가 있으시겠지’라고. 뜻밖의 출근도, 뜻밖의 명동도 그렇게 시작했다. 이젠 퇴근길 횡당보도 앞에 서면 ‘아빠, 안녕!’하고 안부를 전한다. 그리고 깊은 호흡으로 아빠의 숨결을 느낀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작정 믿고 싶은 일들이 있다. 2017년 tvN '알면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사전(알쓸신잡)'에서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었다. 방문지인 통영에서 패널로 나온 정재승 교수가 '과연 우리는 지금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 질문을 과학적으로 바꿔보면 이순신 장군이 53년을 지구에서 살았는데 그때까지 내쉬었던 숨이 400년간 이 지구 대류권에 흩어져 있을 것’이며, ‘우리는 1년에 800만 번 숨을 쉬는데 들이마시는 숨을 다 합치면 2억 리터가 된다’며 ‘이 공기가 지구 대류권에 흩어져서 지난 400년간 균일하게 분포해 있다고 가정하면 한 번이라도 이순신 장군의 입에 들어갔던 숨을 지금 우리가 굉장히 많이 들이마실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진짜 대박이었다. 그 후로 그리운 장소에 가면 의도적으로 깊은 호흡을 한다. 그곳에서 함께 했던 그리운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     


이제는 백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늘 깊은 호흡을 하고, 아빠에게 인사를 전하고, 하고 싶은 말을 건넨다. 힘들 땐 여전히 아빠가 많이 보고 싶고, 아빠의 말이 그립고, 아빠의 격려가 필요하다고. 특히 요즘에 더욱 그렇다고.


김지하 시인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에는 ‘윤배 형님'이라는 소제목으로 아빠에 관한 글이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 그려진 아저씨의 그리움이 마치 나의 그리움 같아 아빠가 그리울 때면 자주 읽는다.      


<윤배 형님>  

    

그 형님이 10여 년 전 간암으로 돌아갔다. 해남 남동 집 귀퉁이 방 어둠 속에 누워, 그 무렵 중병을 앓고 있던 나는 어느 날인가 비몽사몽 중에 문득 허공에 대고 물었다.

"형님 잘 계신가요?"      

대답이 왔다. 빙긋 웃는 얼굴과 함께.  

"나 잘 있어! 자네 이제부터 새 일을 시작해야 할 텐데, 내가 미력하나마 도울게! 다만 이번에는 매사에 독 가지고는 안돼!"      

"독 가지고는 안돼!"

그렇다. 이제는 독 가지고는 안된다. 아마도 독 대신 덕일 게다. 많은 이들의 고통과 헌신을 잊고 묻어버린 채 저희만 잘했고 또 잘한다고 거들먹거리는 세태는 그대로 낄낄 웃으며 넘길 수 있다. 예부터 세상이란 그렇고 그런 거니까.  그러나 아직도 덕이 아니라 독으로 세상을 어찌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그때마다 형님이 떠오른다.        


윤배 형님!

흰 눈 덮인 태백산맥처럼 크고 우람한 윤배 형님!

나의 진정한 형님!


시인의 표현대로 태백산맥처럼 크고 우람하셨던 우리 아빠. 아빠의 덕은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은 지금도 누군가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그 숨결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아빠와 함께 걷던 명동길을 혼자 걷는 지금도 내가 따뜻한 그 숨결을 느끼는 것처럼.      



2- 엄마와 딸.    


딸이 자취를 결정하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날 우리는 명동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렸다. 전에도 특별한 날이면 명동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곤 했었다. 딸의 독립을 축하하며 딸의 건강과 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했지만, 실은 나의 불안과 걱정을 견디지 못한 채 나를 위한 미사를 드렸던 것 같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여전히 딸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으로. 혼자 살면서도 엄마가 정한 방식대로, 엄마 뜻대로 살아주길 바라며.


스무 살 넘어 아이가 독립된 존재로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엄마가 건강하게 아이를 놓아주는 것은 참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관심과 사랑을 뒤로하고 거리두기를 하는 일은  참 어려웠다. 많은 갈등과 다툼의 시간을 보내고, 한참이 지난 후 우리가 완전히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가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엄마의 온전한 기다림이라는 것을.


그땐 그랬다.

엄마가 손잡고 열심히 달려갈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엄마만 믿고, 엄마 손 잡고 따라서 뛰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다 아이가 비틀되기라도 하면 무섭게 다그쳤고, 뒤처지지 않게 빨리 뛰게 하는 것이 엄마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왜 비틀거리는지, 혹시 힘든 건 아닌 지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아니,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혹시 낙오될까 그것만 걱정하고 그것만 두려웠다. 비틀거릴 때, 너무 숨이 차 도저히 뛸 수가 없었던 아이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속도가 다른 아이를 기다리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짜 그땐 몰랐다.


아이가 뛰지 못해 쉬고, 천천히 걷고, 때로 다른 길로 돌아가도, 그럴 수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그렇게 한참을 돌아 제자리로 왔을 때 안아줄 수 있는 마음, 오랜 시간 간절히 기다려 주는 마음이 진짜 아이에게 필요한 엄마 마음이라는 것을 아주 한 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괜찮다며 엄마를 위로하는 딸에게 늘 마음 깊이 미안함을 간직하며, 딸이 보고 싶을 때면 브래드 앤더슨의  ‘너를 안아도 될까?’라는 시를 자주 생각한다.  


   

(생략)     

너의 신발끈을 한 번 더 내가 묶게 해 줘.

언젠가는 너 스스로 묶겠지.

그리고 네가 이 시기를 회상할 때

내가 보여 준 사랑을 떠올리기를.     

네가 옷 입는 걸 도와줘도 될까?

내가 너의 고기를 잘라 줘도 될까?

네가 탄 수레를 끌어도 될까?

내가 선물을 골라 줘도 될까?     


(생략)     


나는 그날이 올걸 안다.

네가 이 모든 일들을 혼자서 할 날이

네가 기억할까. 내 어깨에 목말 탔던 걸?

우리가 던진 모든 공들을?     

그러니까 내가 널 안아도 될까?

언젠가 너는 혼자서 걷겠지.

나는 하루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지금부터 네가 다 자랐을 때까지.     


이 시에서처럼 언젠가 엄마 마음을 더 알고, 엄마가 더 그리운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나는 하루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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