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를 생각하면, 한류를 이끌었던 인기 드라마 '대장금'의 어린 장금이가 함께 떠오른다. 수라간에서 최고 상궁인 정상궁이 꼬마들한테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맞춰보라고 했다. 절대 미각을 가진 장금이는 그 달콤함의 비결을 '홍시'라고 답한다. 왜 홍시 같으냐는 정 상궁의 질문에 장금이는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대답했는데 어찌 홍시 맛이냐고 하시면”하고 우문현답을 날려버린다.
어린 시절, 나뭇잎이 노릇해질 때면 나는 달콤한 홍시를 매일 하나씩 먹었다. 당시 아버지께서 소일거리로 감나무를 기르셨기 때문이다. 전문 농사꾼은 아니지만 감 농사를 하시는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매년 감은 잘 열렸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하나하나 정성으로 익힌 홍시를 타지에 있는 나에게 택배로 보내주셨다.
물론, 어머니는 나를 위해 홍시 외에도 각종 먹을거리를 자주 보내주셨다. 그런데도 홍시가 더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아마도 어린 시절 아버지 방에서 흘러나왔던 옛 가요의 노랫말 때문인 듯하다. 그때 들었던 나훈아 '홍시'의 노래 가사는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중략) 비가 오면 비 젖을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얼마 전 어머니가 냉장고에 얼려둔 홍시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불현듯 이 노랫말이 떠올랐다.
나는 영화감독 이창동의 영화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을 좋아한다.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 출신이라 그런지 문학적인 상징을 자주 영화에 둔다. '초록물고기'는 군 전역 후 더러운 세상에 물든 막동이가 그리워한 어린 시절의 상징이고, '박하사탕'은 점점 변해가는 설경구가 순수했던 젊은 시절의 상징이다. 나에게도 상징이 있다. 바로 ‘홍시’다. 나에게 홍시는 부모님의 사랑이다. 어린 시절 나는 홍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권해도 잘 먹지 않았다. 감보다 자극적인 키위나 포도를 좋아했다. 지금은 내가 홍시의 달콤함을 알게 된 것은 단순히 입맛의 변화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타지에서 생활하며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깨달았기 때문 아닐까. 색이 발간 홍시는 자식에게 보내고, 본인은 모양이 상한 홍시를 드셨을 것이다.
몇 달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한테는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다. 나는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정을 모르고 살았다. 외할머니댁에 가면 어머니가 배우던 수묵화 화집이 가득했다. 신기해하며 이 책 저 책 빼내 들고 어지럽히며 읽었다. “친손주가 봐야 하니까, 조심해서 읽고 다시 꽂아둬라.” 어린 나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아들자식이 딸자식보다 소중하다는 뜻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올랐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명절날이 되면 큰집에는 자주 갔지만 외갓집은 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20대는 서울에서 지내다 보니 어린 시절 이후 외할머니를 찾아뵌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다.
대학 졸업 후 고향에 발령받아 가끔 어머니와 함께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정정하고 까랑까랑하시던 외할머니는 이제 안 계셨다. 무릎이 편치 않아 거동이 불편하셨다. 오랜만에 본 할머니는 다정했다. “아이고, 우리 손주가 이렇게 잘 컸네.” 하시며 연신 내 손을 잡았다. 그 후로 어머니는 자주 나를 외할머니한테 데려가려 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잘 가지 않았다. 그토록 아끼는 친손주가 어련히 잘 챙기겠지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젊은 날, 외할머니는 떡집, 목욕탕 등 안 해본 일 없이 열심히 사셨다. 최근에는 몇 남지 않은 단짝 친구를 보기 위해 보행기로 열심히 친구네 집을 오가신다고 했다. 어느 날 그 친구분으로부터 큰이모한테 연락이 왔다. 외할머니가 연락이 안 닿는다고.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후회했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눈물을 많이 훔치는 어머니지만, 엄마를 잃은 그 슬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외할머니도 어머니의 엄마였다.
젊어서 열심히 살다가 애들 다 키워놓고 나이를 먹게 되면 먹먹해질 때가 있다고 한다.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은 제 살기 바쁘다. 돌이켜보면 나는 외할머니와 같은 노인들을 기력도 없고, 감정도 희미해진 사람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외할머니를 뵐 수 있는 날은 기껏해야 1년에 서너 번이었다. 나를 보면 “우리 아가 왔나.” 하시며 마냥 예뻐해 주셨다. 할머니는 나를 보면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쏟아 놓으셨다. 오래된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놓으시며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 눈치를 보며 “애들 바빠서 이제 가봐야 한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단칸방 문틈 사이로 보이던 외할머니의 못내 아쉬운 표정이 눈에 선하다.
손주들을 보고 싶어 했고, 먼저 떠난 이들을 그리워했다. 바쁜 거 알면서도 외할머니는 다 큰 자식들이 보고 싶었다. 정이 많고, 따듯한 분이었다. 할머니가 생전에 그리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가득하다.
부모의 존재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부모’ 하면 떠오르는 상징이 있다. 어머니에게 있어 그 상징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그것이 나타내는 부모님의 사랑은 과거부터 현재, 미래에도 변함없는 모습일 것이다. 그건 자식을 위한 헌신과 희생, 무조건적인 사랑, 그리고 따뜻함이 아닐까. 냉장고에 얼려둔 홍시를 다 먹어 그것이 없어져도 부모님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