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를 읽고 인천 차이나타운을 거닐다
미세 먼지 없던 어느 봄날,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오정희 작가의 단편 소설, '중국인 거리'를 들고.
언제부턴가 인천 차이나타운에 갈 때는 '중국인 거리'를 꼭 갖고 간다. 한참 빠졌을 때는 필사까지 한 책이다.
많은 문학도들이 사랑하는 이 작품을 내가 처음 읽은 때는, 40대 중반이었다. 뒤늦게 읽었다. 문학청년이 아닌 나는 모르고 살았는데 그 작품을 처음 읽은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어느 카페에서였다. 인천 차이나 타운이 좋아서 종종 가다가, 그곳을 무대로 쓴 작품이 ‘중국인 거리’라는 것을 알고 나서 읽었으니 나에게는 소설보다도 인천 차이나타운이 먼저였다.
이 작품은 한 소녀가 겪는 성장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성 작가가 30대 초반에, 10대 초반의 경험을 풀어나간 작품인데 40대의 중년 남성을 감동시킨다는 사실이 묘했다. 물론, 작가의 글에 어린 풍부한 문학적 향기 때문이겠지만, 1950년대 후반의 빈곤하고 스산한 ‘중국인 거리 풍경’ 속에서 1960년대 서울 변두리의 빈곤한 풍경을 나도 떠올렸기 때문인 것 같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소녀지만 그 소녀를 통해서 나도 어린 시절 겪었던 그 감정을 떠올렸다.
작품의 줄거리를 자세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직접 읽어봐야 훨씬 더 감동을 느끼게 된다. 단편 소설이라 읽기도 쉽다. 6, 25 전쟁 이후, 충남 홍성에서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이사 온 주인공의 가족은 이곳에서 4년 정도를 살아간다. 어머니는 아이를 여덟이나 낳는데, 그 시절 어느 집이다 대개 가난했지만 주인공과 그 친구들도 다 가난하고 험한 삶을 살았다. 험한 일상 속에서 되바라진 아이들의 모습, 미군과 함께 사는 매기 언니, 그 언니처럼 '양갈보'로 살고 싶다는 친구 치옥이의 불운한 삶, 할머니의 죽음, 차이나타운의 음흉해 보이는 중국인들의 모습, 늘 석탄가루가 날리는 하늘... 그 시절의 분위기는 우울하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지켜보는 어느 중국인 청년. 이런 과정에서 성장하는 주인공 소녀는 같이 살던 친척 할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근처 맥아더 동상에 기대어 깜깜하게 엎드린 바다를 보고, 밤새워 불어오는 바람과, 바람에 실린 해조류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이렇게 독백한다.
“인생이란…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뒤를 이을 어떠한 적절한 말도 떠오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다. '중국인 거리'에 나오는 글 모두가 문학적 향기가 넘쳐흐르지만 특히 이 대목을 읽으면 내 가슴은 저릿해진다. 중년인 나도 여전히 ‘인생이란…’ 하면 그 뒤에 이을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의 아픔이 떠오르고 미래는 안개 낀 거리처럼 불투명하게 다가온다. 나이가 들면, 뭔가 알아질 줄 알았다. 웬만한 세상일에는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의연하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과연 인생이란 뭘까?
나이가 들어가지만 어린 시절에서 더 나가지 못한 상태다. 어쩌면 더 나이 들어도 여전히 모를 것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30여 년 전부터, 내가 바깥세상을 그릴 때 가끔 갔던 곳이다. 10월 초의 축제 때는 짜장면도 먹고, 흥겨운 행사도 보고, 한적한 봄에는 자유공원 벚꽃구경도 가고, 밴댕이회도 먹고, 공갈빵도 먹으며 중국 분위기에 푹 젖다가 월미도로 가서 부연 서해 바다를 보았었다. 월미도에서 영종도로 떠나는 배를 타고 가며 따라오는 갈매기에게 먹이도 주었고, 영종도 선착장 부근에서 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에 가 저녁을 먹은 후, 공항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먼 나라를 여행하고 온 것만 같았다.
몇 년 전 오정희 작가가 인천 차이나타운에 직접 와서, 작품의 배경지였던 곳을 설명한 기사가 신문에 난 적이 있었다. 나도 그걸 보고 찾아다녔었다. 그리고 며칠 전 인천 차이나타운을 다시 찾았다. 바람 많이 부는 날이었지만 공기가 맑아서 좋았다.
작가가 실제로 살았던 집은 과거의 ‘청일조계지’ 근처에 있다. 이곳은 개항기, 즉 1883년부터 30여 년간 중국인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언덕에는 중국인들이, 평지 쪽에는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었다. 지금도 언덕 쪽에는 중국풍의 붉은색 식당들과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고 평지 쪽에는 일본식 목조 건물들과 일본 은행 건물들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대불호텔 박물관이다. 1883년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호텔로 식사와 함께 커피를 제공해서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건물이 헐려서 빈 터만 남아 있다가 몇 년 전에 상징적인 건물로 복원이 되었다.
오정희 작가가 살던 집은 대불호텔 맞은편이다. 작품 속에서는 2층 목조 집으로 나오는데, 현재는 3층 석조 건물로 ‘복림원’이라는 중국 식당이 들어서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여 년 전에 작가가 살았던 곳에서, 나는 차돌박이 짬뽕을 먹었다. 맛있었다. 신라호텔 주방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요리사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짬뽕을 먹은 후, 언덕길을 올랐다. 그곳에는 아직도 옛날 집들이 남아 있는데 주인공의 친구인 치옥이가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그 언덕길 끝에는 공자님 동상이 있고 계속 올라가면 맥아더 동상이 있는 광장이 나온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나는 갖고 간 ‘중국인 거리’를 다시 읽었다.
소설 속의 인천 앞바다에는 ‘섬처럼, 늙은 잉어처럼’ 조용히 외국 화물선들이 떠 있었다고 묘사되는데, 지금도 배들이 조용히 떠 있었다. 책을 읽다가 바다를 내려다보니, 커다란 배들이 정박해 있었으나 뱃고동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초봄, 쌀쌀한 날씨 속에 바다는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 침묵이 여전히 '인생이란...' 하는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 중년의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인천 차이나 타운을 거닐었던 이야기와 오정희 작가의 '중국인 거리'에 대한 저의 육성 소개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해주세요. '오디오 클립'에서 '이지상의 책과 여행'이라는 1인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슷하지만 좀 더 자세한 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1630
좀 더 깊고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제가 얼마 전에 낸 '중년 독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제가 중년의 맞이한 '삶의 고비'를 넘기는데 도움이 된 20권의 책들을 소개하고 저의 이야기를 곁들인 책입니다.
물론, '중국인 거리'를 먼저 읽고 나서 보아야 합니다. 문학을 좋아하시고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실 분이라면 '중국인 거리'는 꼭 읽고 가시기를 권합니다. 아름다운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