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세계는 언어화되면서 규정된다.
소쉬르는 ‘언어로 형상화되기 전까지’ 우리의 기억은 부연 성운과도 같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언어화될 때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에스키모인들은 설원에 펼쳐진 눈에서 수십 가지 형태의 눈을 보지만 한국인들은 한 가지 눈만 볼 것이다. 우린 우리의 풍토에 익숙한 몇 가지의 눈만 구별하지 북극의 설원에 펼쳐진 미세한 눈을 구별할 수 없다. 다르게 보인다 해도 인식의 세계에 잡히지 않는다. 에스키모의 언어에는 눈을 표현하는 언어가 수십 가지가 있지만 한국어에는 몇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활 속에서 형성되었지만 그 언어는 우리의 인식을 한계 짓는다. 우리는 언어화된 것만 보며,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들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고 부연 성운처럼 퍼져 있을 뿐이다. 흔히 생각이 명쾌해진 후에 그것이 언어화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언어화되었을 때 생각이 명쾌하게 드러난다. 즉 언어가 먼저라는 것이다.
물론 언어 이전에,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눈앞의 객관적인 현실이 있다. 하지만 인식하는 주관적인 세상은 각자가 다르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다른 관점, 다른 세계관으로 세상과 사람을 인식한다. 다른 언어의 굴레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도 미세하게 들어가면 다르게 인식한다. 같은 것을 보아도 기억하고 판단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 인간은 현실을 언어라는 기호를 통해 우회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기 식대로 보고 상상한다.
내가 언어를 쓰지만 동시에 언어가 나의 생각과 행동을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글 쓰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많이 한다. 글은 머릿속에서 다 정리된 후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명쾌하지 않은 생각, 감정, 이미지가 ‘한 조각’의 글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이 다른 글을 불러낸다. 즉 언어는 쓰는 사람에 의해 시작되지만 언어 자체의 힘과 법칙에 의해서 전개되는 미묘한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또 언어화되는 순간 성운처럼 부옇게 고인 생각, 감정들이 분명한 형상을 드러낸다.
그럼 누구나 단어를 던져놓고 나면 글이 자연스럽게 잘 나올까? 그렇지는 않다. 부연 성운 같은 기억의 세계가 풍부해야만 거기서 튀어나오는 언어가 풍부해지고, 경험의 세계가 풍부해야만 기억의 세계가 풍성해진다.
결국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경험의 세계, 즉 삶의 세계를 뻑적지근하게 살아야 하고, 그걸 기억으로 담아내는 프레임이 깊고 날카로워야 하며, 글을 쓰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