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조각

자기 고백

by 이준서

0.


실존주의가 내려주는 과제는 평생의 과업이다.
그러나 그것을 명민하게 인식하는 이는 드물다.

J에게 L은, 자신을 비롯해 그 드문 이 중 하나다.

권력, 연애, 인간성 등
다양한 주제를 실존의 질문으로 수렴시키려는 두 사람의 처절한 시도는,

오히려 유쾌하게 서로를 비추며 나아간다.

이 글은 대화록이자
J의 자기 고백이다.



1.


J : 존재만으로 빛나십니다. 아, 뭐 술 마시고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평소엔 이런 말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아서요.

L : 감사합니다. 감동이네요. J님도 멋있으십니다.

J : ㅋㅋㅋㅋㅋㅋㅋ 아닙니다 ㅠ


그 짧은 대화 이후, J는 종종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저런 말을 꺼냈을까?'


사실 J는,

L을 자신과 겹쳐보며

자기 연민으로 덧칠한 칭찬을 했던 것이다.



2.


J: 처음은 인간을 향한 투쟁이었는데, 어느새부턴 저를 향한 투쟁이 됐네요.
'내가 인간 자격이 있나 보자.' 라는 식으로요.

L : 저도 요즘 인간성이란 뭘까, 종종 생각합니다.


J는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안의 가장 연약한 곳까지 들여다보려 애썼다.

때론 가학적으로, 고통스럽게.



3.


J : 완전히 결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요?

L : 서로 똑같으면 거울 보면서 연애하지.
뭐하러 연애해요. 그건 그냥 혼자 사는 거죠.


J는 아가페적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능한 많은 이에게 사랑을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J의 소망을 방해한다.





4-1.


L :


만약 AI가 모든 ‘일’을 대체해요.
인간은 단순히 AI보다 열등한 존재가 되고,
그저 행복만을 누리다 생을 마감하는 미래.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잖아요.


행복을 보장해주는 주사나 약이 개발돼요.
하루에 한 알만 먹으면,
불쾌한 감정은 일절 없이,
그저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하루가 이어져요.
해야 할 일은 모두 AI가 처리하니까요.

그런 미래가 온다면, 드시겠어요?


제 생각엔, 결국 두 갈래예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믿으며
약 없이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 믿음을 포기하고
약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



J :


저는… 전자를 택할 것 같아요.
하지만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하겠죠.

AI보다 불완전하고, 열등한 존재로서의 인간.
그런 미래를 충분히 합리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가 오면, 인간성에 대한 깊은 회의가
사회 전반을 감쌀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저는
어떻게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려 애쓸 거예요.

아마 저는 불행할 겁니다.
곁엔 행복해지는 빠르고 편한 길이 있는데,
저는 굳이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할 테니까요.

L님은요?



그 뒤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혹은, 기억하길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실존에 대한 해답은 끝내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4-2.


J의 대답에는 그의 사유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현상을 인과로 환원하기보다는, 그 너머의 의미와 본질을 추적하려는 태도.
그에게 인간됨의 포기는, 설사 불행을 감수하더라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대화는 두 달 전,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J는 그 장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제 와 글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최근 있었던 L과의 대화(1-3)에 대한 작고 조용한 감사의 표시.다른 하나는, L이 J에게 왜 그토록 특별한 인물로 남는지를 기록해두고 싶어서 이다.


4-3


J는 이 글을 L에게 전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글을 읽지 않더라도, 그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전해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알고있다.
J는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가 읽고, 감상을 남겨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말하지 않은 이유는
L이 부담을 느끼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스쳐 지나가는 일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신은 알고 있다.

J는 사랑을 주되, 사랑받을 자격을 스스로 유예시키는 사람임을.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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