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 말이 그토록 반가웠을까

싸가지가 생겼어

by 결 디자이너

감정은 말보다 먼저 몸에서 시작된다.


“싸가지가 생겼어.” 둘째의 그 말이 하루 종일 내 귓가에 맴돌았다. 왜 나는 그 말이 그토록 반가웠을까? 보통의 부모라면 아이가 ‘싸가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거나 그냥 무심코 지나갈 일일지도 모른다.


몸에 남는 감정의 흔적

감정은 말보다 먼저 온다. 둘째는 그날 캠프에서 호흡 명상을 하다가 가슴이 아프다고 했고, 눈물이 말을 대신했다. 나는 문득 갓난아기였던 둘째를 떠올렸다. 엄마 껌딱지처럼 붙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얌

나는 왜 그 말이 그토록 반가웠을까

전한 첫째를 키울 때랑은 사뭇 달랐다. 그 울음의 결에서 감정을 느꼈던 기억.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다는 걸 나는 오래전에 알게 되었던 거다. 그래서 더 아팠다.

“엄마가 몰랐네. 그렇게 힘들었다는 걸.”

말로 묻기 전에 몸으로 느껴졌던 걸까. 감정은 그 흔적을 몸에 남긴다. 쌓이고 멍이 들고 그러다 언젠가 문장이 되어 툭 튀어 나온다.

둘째의 ‘싸가지가 생겼어’도 그렇게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 속에서 나는 기운을 느꼈다. 당당함, 자기 긍정.

이후로 나는 아이의 말보다는 기척을 듣는다. 침묵과 눈빛, 고개를 돌리는 속도까지. 감정은 말보다 먼저 몸에서 시작된다.


감춰온 목소리의 기억들

둘째는 오랫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감춰온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운동회 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이어달리기를 하는데 둘째는 바톤을 받고 전력을 다해 달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느껴졌다.

“아까 다리 아팠어?”

집에 와서 아이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쟤~어떻게 뛴다, 저렇게 뛴다.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잖아, 그런 말 듣기 싫어서 지지 않을 정도로만 뛰었어.”

음악 시간에는 일부러 피리를 못 부는 척했다는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리코더를 워낙 잘 불었던 둘째는 새로운 악기인 피리도 쉽게 불었다.

“잘 불면 애들이 다 와~~ 그러면서 보잖아. 일부러 안 불어.”

한번은 학교 공개 수업에 참여를 했는데 둘째만 발표를 안 하고 손도 안 들었다.

“내가 틀린 말 할까 봐. 비웃을까 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편해”라고.

누군가와 충돌하는 것을 싫어해서 반 친구와 작은 다툼이 있어도 결국 둘째가 먼저 사과했다고 했다.

“그냥 빨리 끝내고 싶었다”라고.

둘째는 유치원 때까지도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똑순이였다. 유치원 졸업식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초등학교 가면 걱정할 거 하나 없는 아이에요.”

이런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자신의 목소리보다 평화를 선택했던 순간들이 쌓여갔다. 힘든 일이 있어도

“별일 없어”가 입버릇이었다. 그게 둘째의 방식이었다. 목소리보다는 조용한 침묵을 선택하던 아이.

그래서였을까. ‘싸가지가 생겼어’라는 말하는 둘째의 변화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둘째는 내가 마흔이 넘어서야 배운 교훈을 열여섯 살에 이미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엄마로서 가장 보람찬 순간 중 하나였다.

그날 밤, 나는 둘째의 방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어두컴컴한 동굴의 방이 아니라 자기만의 공간이었음을 알았으니까. 문 앞에 서서 작게,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잘 자, 우리 딸. 네 ‘싸가지’가 더 자라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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