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시간 1> 2021년 7월 12일 두달전.
14년 동안 시어머니와 목욕탕을 딱 한 번 갔다. 동네에 새로운 목욕탕이 생겼는데 너무 좋다고 한다. 어머니가 가보자는데 같이 안 간다고 하면 섭섭해하실까 봐 태연한 척 따라갔다. 서로 등짝을 밀고 있지만, 옆에 있어도 있는 게 아닌 그런 느낌. 어머니도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신 건지 그 뒤로 서로 목욕탕 같이 가자는 말을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품격있는 존중선을 만들고 넘지 말자는 암묵의 의견 일치를 보았다.
7년 전 폐선암진단을 받고도 잠잠했던 어머니의 암세포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폐암 환자라는 것을 가족들도 무뎌질 만큼 그동안 항암치료 없이 잘 견디셨다. 더 이상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던 암세포는 복막에 새끼를 치고 강력한 놈이 되었다. 의사는 이제 때가 되었다며 임상을 권유했다. 표적 치료제가 없었던 어머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임상 1상이 시작되었다.
항암치료 1주차 매일 같은 시간 아침 저녁으로 항암제를 먹어야 한다. 항암제 뿐만 아니라 부작용으로 인한 변비약, 피부과약 등 챙겨 먹을 것이 많았다. 일정한 시간에 약을 먹어야 하고 앞뒤로 금식 시간도 지켜야 하며 무조건 잘 드셔야 한다고 했다. 항암 일지를 체크하며 나의 하루 일과도 예민해졌다.
2주차는 어머니의 손끝이 다 까지고 염증이 생겨 비닐장갑을 끼고 세수를 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음식을 거의 못 드실 만큼 구토 증세도 심해졌다. 복막으로 전이된 암으로 인해 복수가 차서 만삭의 배만큼이나 불렀다. 어머니는 병원에 일주일을 입원하여 복수를 빼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나는 회사를 관두고 쉬고 있었기에 일주일 내내 24시간 병간호을 했다. 이 시간만 지나면 어머니가 곧 일어나실 줄 알았다. 여태껏 아이들 키워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도 못하나 싶었다.
임상의 고비는 여러 번 왔다. 복수에 장기가 눌려 대소변은 나오질 않고 변비로 고통스러워하시다가 혈변을 보셨다. 응급실에 입원하여 대장암으로 전이된 건 아닌지 추가 검사가 필요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입원 기간은 늘어갔다. 나는 항상 가족 중에 일타로 간호를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혈변은 대장 쪽으로 전이된 것이 아니라 치질 때문인 걸로 결론이 났다. 큰 한숨을 돌렸지만, 항문에 약을 바르고 온몸과 엉덩이가 더 까칠하게 벗겨지지 않도록 로션을 발라야 했다.
14년을 유지했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그 거리감과 품격은 숙명이 아니었다. 벌거벗겨져 내 눈앞에 쳐들고 있는 엉덩이는 꼭 늙은 코끼리의 주름처럼 쭈글거리고 늘어졌다. 세상에나 !!!! 이쁘다고 뽀뽀하고 보송보송 엉덩이 만져주며 새끼들 키워주었더니 이젠 다 써먹었다고 쭈글해진 엉덩이는 쳐발쳐발이냐!! 어머니를 대변하여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내며 외치는 것 같았다. 검게 그을리고 쭈글거리는 엉덩이는 곧 내 미래의 엉덩이로 교차하며 복잡한 감정이 일어났다. 내가 공감 능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시어머니 걱정을 뛰어넘어 미래에 감당할 고통까지 나의 내부로 들어왔다.
나무의 나이테는 늘어갈수록 긴 시간의 축적된 시간을 인정받아 거목이 되거늘. 인간의 나이테는 쳐진 엉덩이의 주름 따위로 기억되는 것만 같다. ‘나도 축 처진 쭈글한 엉덩이를 가진 나이가 되어 이따위로만 나를 기억한다면....’하는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나는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이대로 있다간 정체 모를 두려운 감정에 터져버릴 것 같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때 떠오른 사람은 나의 첫 직장 상사이시며 멘토인 분.
“실장님 제가 그 쭈글하고 시커먼 엉덩이를 본 순간 무서웠어요, 이러다가 똥, 오줌 내가 다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 엄마도 이렇게 못 해주었는데 왜 남의 부모를...왜 제가 다 하고 있냐고요. 병간호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뭐가 진심인지 모를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지금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은 소용없었다. 20년을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내 맘대로 편히 쉬고 싶다. 하필 이때 코로나로 여행도 못 가고 떠안기듯이 시부모를 간호하는 나의 처지가 너무 싫다. 내 인생도 위기냐 기회냐의 갈림길에 불안하다. 화려한 패션계에서 예쁜 것들만 보다가 남의 엉덩이까지 볼 만큼 내가 밑바닥이 된 것 같아 내가 꼴 보기 싫다. 그래, 한 번쯤은 폭발시켜야 할 감정을 쏟아냈다. 신세 한탄 같은 얘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들춰보지 못했던 ‘나’에 대한 얘기다. 이런 얘기를 누구를 붙잡고 해야 할지, 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 눈물이 흐르는 대로 내 마음을 흘려보냈다.
실장님은 조용히 나의 폭발된 감정을 받아주셨다.
“그래. 너의 엄마도 그렇게 해주지 못했는데 남의 부모 모시기가 어렵지. 그런데 선미야. 가장 힘들었을 때 진심으로 만나지는 게 있거든. 힘들 때일수록 가장 지키고 싶은 것, 그걸 생각해봐. 나는 가족 때문에 힘들었을 때야말로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실장님은 내 진짜 속마음을 꿰뚫는 것처럼 얘기를 이어가셨다.
"내가 아는 선미 너는 책임감이 강해서 지금의 상황을 절대 못 본 체 못해. 너의 마음은 네가 해야 할 것을 알아. 내가 아는 선미는 그런 사람이지. 어머니가 딸도 아닌 며느리 너에게 많이 의지하시는데 내가 딱 봐도 가까이 살지. 쉬고 있지. 아무리 가족이 분담한다 해도 네가 많은 일을 하게 될 거 같은데. 어차피 할 거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지 말아라."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를 위로해주는 말은 “너는 그런 사람이야. 못 본 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네가 많은 일을 하게 될 거야” 그냥 나를 인정하는 말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실장님은 카톡을 보내셨다.
“너의 선한 마음이 지켜지길 기도할게.”
눈앞의 현실을 뛰어넘는 말이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내가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고발당해야 비로소 또 하나의 눈이 생긴다고 이재철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며느리가 효심이 깊다는 말을 들을수록 더 ! 더 ! 잘해야만 할 것 같다. 부모를 공경하고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윤리와 책임에 나 자신이 위협을 느끼고 있다. 겨우 3개월 만에. 이런 마음이 드는 것조차 죄스럽다. 착해야만 했던 내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혼란스럽다.
열 번의 고품격 강의 보다 엉덩이의 민낯에서 시작된 글쓰기야말로 선한 마음을 지키기 위한 나의 고발장이다. 쓰디쓰기 때문에 ‘쓰다’가 된 것이 아닐까. 달갑지 않고 싫거나 괴로운 것을 쓰라고 ‘글_쓰다.苦’이다. 나는 이 글쓰기를 계속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