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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Mar 29. 2024

나는 죽지 못해 산다

 나는 '장기하와 얼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그들의 노래 가사에 감탄을 하곤 한다. 어쩜 이렇게 통찰력 있는 가사를 쓰는 걸까, 누구나 해볼 법한 생각들이지만 그래서 더 표현하기 쉽지 않은 것들을 맛깔나게 또 때론 후련하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그중 내가 최고의 가사라고 생각하는 건 '별 일 없이 산다.'이다.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툭, 무심하게 내뱉듯 부르는 창법과 어우러져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래 별일 없이 살아서 좋겠다, 부럽다 야' 하고 말해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노래다. 아니, 부럽다고 말해줘야 할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부럽다. 별일 없다니, 별다른 걱정도 고민도 없고 사는 게 재밌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죽지 못해 사는데, 사는 게 진짜 재미없는데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한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는데, 우연히 펜꽂이에 작은 칼이 하나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당시 나는 판다추리문고라는 추리소설 시리즈를 탐독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묘사된, 살인범이 사용했던 단도처럼 생긴 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봉투를 자를 때 쓰는 페이퍼 나이프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늘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에 빠져 있던 내 눈에는 영락없이 단도처럼 보였다. 그 칼을 보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저걸로 내 가슴을 찌르면 죽을까?'였다. 그다음에 바로 든 생각이 '죽으면 편하겠다.'였다. 죽음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라도 죽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참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일곱 살 어린이는, 아침마다 운전대를 잡고 출근하면서 차 속에서 '하나님 저는 왜 태어났죠? 왜 저를 만드셨어요?'라고 반문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래요, 나는 여전히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냥 죽지 못해서 사는 거죠.

 내가 우울증인지 아닌지는 진료와 검사를 받아야 확진이 되는 건데, 나는 내가 우울증인지 아닌지 무려 20년 동안 헷갈려하다가 겨우 병원 문턱을 밟았다. 헷갈렸던 이유 중 가장 강력한 이유는, 나의 물욕과 식욕이다. 이쁜 옷을 좋아하고, 가방을 좋아하고, 액세서리도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이나 음료를 정말 좋아한다. 삶에 대한 의욕은 없는데 이쁘게 꾸미고 다니고 싶고 맛있는 음식 먹는 것도 너무 좋다는, 이 모순에 대해 나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일이라도 절대자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훌쩍 떠나고 싶다면서, 옷과 가방을 사들이고 커피원두와 차를 종류대로 사들이는 나. 맛있는 음식과 식당에 대한 정보만 있으면 눈이 휘둥그레지며 당장에라도 달려갈 태세를 취하는 나. 포털의 저장 기능을 이용하여 각종 맛집과 여행 정보가 담긴 포스팅을 잔뜩 저장해 두고 쉬는 날엔 어디 가서 어떻게 놀고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는, 이런 의욕 넘치는 내가 우울증이라고? 죽고 싶은 건 맞아?라고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여러 차례의 공황발작을 겪고 나서야 뭔가 문제가 있는 건 맞구나, 하고 수소문해 찾아 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공황장애, 우울증, 불안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여러 종류의 검사를 받았는데, 그중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에서도 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를 붙잡아 주는 건 기독교 신앙과, 내가 키우고 있는 두 아들이었다. 1년여의 약물 복용과 상담을 거쳐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완치라는 게 내가 공황과 불안과 우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제는 굳이 약으로 뇌의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거나 누군가가 끊임없이 나의 잘못된 인지구조를 바꿔 줘야 하는 그 단계를 지난 것뿐이다. 나는 여전히 죽지 못해 산다. 이쁜 옷과 가방을 사고, 여행도 자주 다니고, 맛있는 음식과 차를 마시는 행위를 너무 사랑하고, 친한 사람들과 한 잔 기울이며 시답잖은 수다를 떠는 것도 좋아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아들 둘을 보며 '그래도 저것들 서른 살까지는 내가 살아 있어 줘야 하지 않을까(아직도 이십 년 여가 남았네...), 하나님 그때까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도록(읭?) 도와주세요'하고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죽지 못해 사는 나 자신이 불쌍하거나 부끄럽진 않다. 죽고 싶지만 어떻게든 맛있는 것을 먹고 이쁜 것을 보며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고 있잖아? 삶에 대한 의욕과 재미가 가득하고,  어깨에 반드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어떤 것-직업이든, 가족이든, 내가 받은 소명이든-을 위한 거룩한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무척 부럽다. 그러나 죽지 못해 살면서도 어떻게든 버둥거리며 살아 내는 내 삶이 값어치가 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늘도 죽지 못해 산다.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고 불안도 많다. 나는 하루하루가 지겹고 어쩌다 가끔 기쁘다. 무병단수를 꿈꾸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카페인의 힘으로 버텨 내며 오늘치의 삶을 견뎌내고 있다. 내일 일은 제발, 내일 커피를 내리며 투덜거릴 내일의 나 자신에게 미루자고 나 자신을 달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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