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진보는 더 나은 삶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같은 기술이라고 해도 전혀 반대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원자력 기술을 들 수 있는데, 안정적인 대규모 전력을 공급할 수 있기도 하지만 핵무기로도 사용이 되었고 핵무기의 위력은 다른 기술들과 융합하면서 더욱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기술로는 아마 크리스퍼(CRISPR_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라고 하는 유전자 편집 기술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사람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바이러스에 덜 취약한 유전자를 가지게 하거나 특정한 병에 걸리지 않는 개량된 인류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이 기술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기술은 최근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퇴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기술의 진보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어렸을 때 만화에서 그려놓은 미래 세계를 상상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들도 있을 겁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도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었지만 미래가 현실이 될 만큼 세상은 변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상으로 그려놓았던 미래의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이 현실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당시의 만화에서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로봇이 사람의 일을 대신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몸 대신 머리를 더 많이 쓰게 됩니다. 결국 왜소한 몸에 큰 머리를 가진, 마치 문어와 같은 모습이 미래의 인간이 될 것이라는 조금은 반갑지 않은 상상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머리가 작아야 예쁘고 잘생긴 것이고 적당한 근육을 가진 탄탄한 몸을 가진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라는 인식도 생겼습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아닌 곳에서는 머리가 크다거나 작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아 어쩌면 이것은 한국의 특수한 현상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알약 하나만 먹으면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어 사람들은 밥을 짓는 불편함을 덜게 될 것으로 생각한 적도 있는데, 지금의 현실은 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전국을 찾아다니면서 더 많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고 돈도 버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상상은 자유이기 때문에 그 상상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의 마음에 잘못된 상상을 주입한 만화가들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한편, 지금은 소위 AI 기술이 세상의 모든 일에 관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내가 어려서 본 만화에는 로봇도 있었고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말하는 자동차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기껏해야 사람의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의 인공지능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인공지능이라는 것은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들도 단숨에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며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되던 예술 분야까지도 진출했습니다. 그런 AI는 나와는 관련이 없을 것 같아 관심도 가지지 않았었지만, 그것들은 어느새 안 방 깊숙이 들어와 앉았습니다. 사실 얼마 전 일주일에 단돈 6,600원으로 수십 개의 서로 다른 장르의 노래를 만들 수 있었는데, 사람인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가사를 끄적이고 음악의 장르를 정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꽤 들을 만한 음악이 만들어져 나옵니다. 아마 조금 더 비용을 쓰면 코러스도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더 많은 다양한 목소리의 가수를 초대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곡 당 22,000원을 추가로 지급하면 창작자로 인정해 주는 증명서도 만들어 주는데,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환경이라면 옛날 그 시절 만화가들이 그렸던 큰 머리와 빈약한 팔다리를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 나타날 시간이 된 것일까요?
AI로 만든 노래. Two Little Dolls in My Windowsill. by Choboo. 2025.08.06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인류의 진화와 관련해서 하나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소위 진화의 행진(The March of Progress)라고 하는 것으로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수 십만 년 동안 인류는 유인원에서 진보의 행진을 통해 지금의 인류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지요. 그런데, 최근의 고인류학은 이러한 선형적인 진화는 있을 수 없었으며, 실제로 다양한 호모 족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의 현생인류라고 하는 호모사피엔스가 살던 시대에 호모날레디라고 하는 다른 인류도 동시에 존재했다는 겁니다. 호모날레디는 뇌가 현생 인류의 1/3 밖에 되지 않지만 직립 보행을 했고 불을 사용했으며,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인간에 대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해봐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AI가 일상이 된 지금의 세상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하거나 사용하기 시작한 과학자들은 AI에게 정확한 목표함수를 주고 훈련을 시켜서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진일보한 AI를 개발해 나가고 있으며 AI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인간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조금 다른 종류의 인류인 것 같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AI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AI가 없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AI가 한 일이 곧 자신이 한 일이며 그로 인한 결과를 대단한 업적으로 둔갑시켜 자존감을 높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너무 쉽게 가능한데, 좋은 AI 툴과 업적을 과시할 수 있도록 블로그와 같은 플랫폼에 가입만 하면 됩니다.
이런 인류를 Homo Narrativus Syntheticus(호모 내러티브스 신세티쿠스)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AI를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성하며, 그 창작 행위 그 자체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인류의 특성은 매일 대화형 AI를 통해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글을 순식간에 수 십 개씩 생산해 냅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복사와 붙여 넣기 기능을 통해 블로그에 백여 개의 글을 30분 정도면 모두 올릴 수 있습니다. 글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이들은 대화형 AI가 만들어 낸 글이 진실임을 굳게 믿고 그 믿음은 곧 자신이 스스로 쓴 글이라는 자부심으로 전환되어 충만한 행복감에 사로 잡힙니다. 잠시 기다리면 블로그에서는 좋아요와 구독을 알리는 알림이 울리기 시작하고, 간혹 멋진 글과 깊은 지식에 깊이 탄복한 블로그 독자의 댓글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블로거의 자존감은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오늘도 하루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준 AI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다지고 다음날은 또 다른 주제의 글 백 여개를 생산할 계획을 세우면서 잠자리에 듭니다.
Homo Narrativus Syntheticus 그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이지만 그들은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서 10배의 글을 읽고 조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호모 사피에스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호모 내러티브스 신세티쿠스에 비하면 진화가 덜 된 종(種) 인지도 모릅니다. 이들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능력자로 보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신학대전은 70여 권에 달하는 어려운 책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년 정도에 걸쳐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완성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쓴 책이 400여 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와중에 신학대전이 가장 쉽다고도 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49세에 사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일 년에 몇 권의 책을 쓴 것일까요? 한 살부터 책을 쓰지는 않았겠지요? 도저히 물리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후대의 학자들은 그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동시에 구술한 내용을 수사들이 받아 적었다고 판단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은 어렵기는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철학과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커다란 틀을 제공함으로써 인류의 정신문화를 고양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호모 내러티브스 신세티쿠스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능력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을 모두 버리라고 합니다. AI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AI는 토마트 아퀴나스를 뛰어넘어 절대적인 믿음을 줄 수 있는 신의 영역에 자리합니다.
기원전 800년에서 200년 사이의 시대를 칼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 (Axial Era)라고 정의했는데, 그 시대에 발생한 일들이 지금 인류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냈습니다. 축의 시대에는 수많은 선각자들이 나타났는데, 인도 지역에서는 석가모니 고타마, 헤브라이의 예언자들, 중국의 공자와 노자, 이란의 현자 조로아스터,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등장하여 인간의 문제와 본성, 그리고 한계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그들의 가르침이 인간이 인간인 이유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결정지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또 다른 하지만 더욱 강력한 축의 시대가 열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자와 고타마, 조로아스터와 소크라테스는 서로 교류도 없었으며 상대방의 존재조차도 몰랐지만 인간의 모습을 결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AI는 전 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실시간 교류도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내러티브스 신세티쿠스와 더불어 경쟁을 해야 한다면 지식과 정보처리 능력 측면에서는 생존이 불가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정답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아닌 정답이 아니더라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한 자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재료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생존경쟁을 넘어 진화를 통해 더 나은 인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