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죽은 그대에게

by 장순혁

감정이 죽은 그대에게 나는 이리 글을 씁니다
그대가 긴 글에 관심을 잃고
짧은 글자들의 모임과 단편적인 영상들만을 좇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이 글은 한 번 읽었으면 합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그대는 애써 잊으려
무언가를 마시고 무언가를 태우고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지웠지만
기억은 문지를수록 또렷해져
그대의 상실감은 넘쳐흘렀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들로부터 치유해야 한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 듯이 아니 어쩌면 모르는 듯도 동시에 하면서
찬란한 세상에서 흑백의 눈으로 살아가기로 하였지요
끝에서 끝으로 흐르는 강은
출발과 도착이 다르지 않은 같은 것이기에
그대는 영원한 강변을 걸었지요
바이올린 긁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날카로운 날붙이로 줄을 모조리 끊고는
피아노를 조립하던 그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마저도 결국 음정이 맞지 않는다며
망치로 부수던 그대의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검은 중절모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검은 코트로 온몸을 가린 채
검은 구두를 신고 그대는 어디로 향하였나요
그대는 흔적을 원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아직 그대를 기억합니다
필름 카메라로 어둠을 찍으면 그 무엇보다 밝듯이
나의 눈에 비친 그대는 그 무엇보다 새하얬습니다
낡은 나무다리의 절절한 신음을 들으며
그대 역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걸어갔습니다
나의 자그마한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가
그대에게 균열을 만들어낼 것 같아
나는 그런 그대를 그냥 떠나보내고야 말았지요
혹시 이제는 그대가 단단하고 또렷해져서
나의 말이나 행동에도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의 긴 글에 답장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전에 나의 긴 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아니 그전에 나의 존재를 잊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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