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여권부터 가지고 와

계획대로 되지 않은 여행이라는 키워드 앞에 떠오른 기억

by 쏘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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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사원들. 전부 여권부터 가지고 와." 이게 모두 나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글로벌 마케팅팀의 어느 부서, 과장님이 황당해하며 사원들을 소집했다. 그렇지만 그건 뭐 내 잘못은 아니었다. 으음. 무지도 잘못이라면 잘못일 수 있지만....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부서 배치된 지 3개월 차, 부장님이 말했다. "아, 담당자가 바뀌었지. 이번 러시아 CIS 출장자도 바꾼다. 이번에 정사원이 간다." 이 말은 모두를 당황시켰다. "부장님, 이번 출장은 아무래도 정사원이 가는건 무리 아닐까요? 이번엔 다른 사람이 가고 다음 출장에 보내시는게..." 과장님은 진심 걱정되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사원이 러시아 CIS 담당이잖아. 무조건 담당자가 가는거야."


으핫. 부서배치 3개월. 그 이야기가 나오기 3일전 쯤 담당 지역이 정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출장은 1년에 한번 있는 신제품 기술 교육을 위한 미팅. 판매하는 제품 특성 상 이런 기술교육은 어렵고 중요했다. "부장님, 이 미팅에 사원을 보내면 지역에서 불만이 생길거에요. 이 지역을 무시해서 사원을 보냈다고." 과장님의 거듭된 만류에도 부장님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담당자가 출장가는건 당연한거지. 이제부터 우리 부서는 예외없이 담당자가 출장을 간다." 오히려 이렇게 못박았다.


사실 당시 우리 부서는 특수상황 속에 있었다. 마케팅에 새 바람을 기대하며 만들어진 부서. 새로운 피의 수혈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어지길 원했던건지, 부서의 반이 1년차 신입사원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부서의 첫멤버였고, 이제 막 세팅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보니 각 지역 담당자 역시 반은 신입사원이었다. 부서장님의 저런 의지가 아니었다면 담당자가 직접 지역을 상대하기 어려운 구조. 부장님은 승부수를 던졌다. "우리부서 사원들은 과장급이다. 무조건 직접 한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하아. 앞이 캄캄했다. "정사원, 어쩔수가 없네. 내가 막아보려고 했는데 부장님 의지가 저리 확고하니. 지금부터 잘 준비해보자." 첫 출장이었지만 축하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순간. 그랬다. 다른 사원들은 자신들의 미래 예고편을 보는 듯 긴장했고, 과장님들은 얘를 어찌 준비해서 보내나 걱정이 가득했다.


그날부터 밤샘의 날들이 이어졌다. 설상가상. 회사에서는 원가절감을 위해 출장자 축소를 지시했다. 전략 마케팅팀에서 출장자는 딱 한 명이 가능한 상황. 이 출장의 메인 부서인 우리부서 출장자가 전략 마케팅팀의 모든 PT를 맡아야 했다. 그리고 하필 그건 나였다. 전형적인 문과, 사회과학 전공자. 기술이라고는 'ㄱ'자도 모르는 내게 신제품 신기술 교육 PT까지 맡겨졌다. 게다가 그 모든 PT는 영어로 진행된다. 내 생애 첫 영어 PT였다. '내 생애 첫'이라는 수식어가 너무나 많아져버린 출장이다. 하아, 기술 교육을 한국어로 받아도 못 알아듣는 내가 영어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출장의 첫번째 문제는 다른데서 터졌다. 그건 바로 나의 여권. 회사 담당자를 통해 비행기 예약을 하려고 가지고 온 내 여권의 만료일이 문제였다. 그 출장일에 나는 그 여권을 쓸 수가 없다. 솔직히 여권의 만료일을 보자마자 안심했었다. '오, 이번 출장은 어차피 못 간다.' 슬쩍 내민 내 여권을 보고 과장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여권을 받아들고 바로 부장님 자리로 향했다. "부장님, 정사원 여권이 곧 만료여서 이번 출장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답이 돌아왔다. "여권 다시 만들어." "부장님. 출장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 전에 여권 재발급이 어렵습니다." "그럼 출장일정을 조정하던지. 어떻게든 그 전에 여권을 만들던지. 안 되면 되게 하란 말이야."


아니, 그냥 출장자만 바꾸면 그만이었다. 바로 3일 전까지 이 지역을 담당했던 이도 있고,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파트장도 있었다. 왜, 어째서, 이 사원이 꼭 가야한단 말인가.


출장일정 조정이라는게 말이 쉽지. 이 출장은 나의 단독출장이 아니다. 각 팀에서 한 명씩 총 세 명이 함께 가는 출장. 본사 출장자의 일정조정은 그래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더 큰 문제는 러시아/CIS 지역의 각 지법인의 마케팅, 영업, 직원교육 담당자 및 주재원들이 모두 그 일정을 비워둔 상황이었다는거다. 작은 나라는 우리가 출장가는 좀더 큰 나라로 이동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와 호텔 예약까지 완료한 상황이었다. 현장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이 하루에서 3일까지 통으로 일정을 빼는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샛노란 병아리 사원 여권 만료일정때문에 모든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는 얘기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래서 과장님과 내가 선택한 건 이 상황을 관계부서에 알리는 대신 여권을 하루라도 더 빨리 나오게 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정사원, 일단 오늘은 다른 일 할 것 없고 어떻게 하면 여권을 빨리 받을 수 있는지 그것부터 알아봐. 나가서 처리해야 되면 지금 바로 나가고."


회사의 출장담당자에게 먼저 연락했지만 당연히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때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딘가 돈을 더 많이 주면 빨리 처리주는데가 있다고 들은 것 같아.' 검색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민망하고 미안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내 사비가 얼마가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참 절실했다. 이게 불법인지 아닌지조차 생각할 여유 없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마구 검색을 해댔다. 다시한번 강조하자면 당시 나는 입사 3개월차 햇병아리였으니까.)


검색으로 답이 나오지 않아 기존 여권을 들고 무작정 나갔다. 여권민원실 근처 사진관 (여권 사진을 찍는)에 슬쩍 들어가 혹시 그런 방법을 아냐고 물었다. 결론은 '지금은 안 된다.'는 거였다. 전자 여권으로 바뀐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편리한 전자여권은 모든 프로세스도 명확히 만들었다. 하나만 슬쩍 끼워 빨리 처리할 수 없도록.


할수없이 나는 그대로 여권민원실로 갔고, 거기 있는 사진 자판기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사진 퀄리티 따위 안중에도 없던 나는 "누구세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엉망진창 사진을 붙여 새 여권 신청을 했다. 그리고 터덜터덜 사무실로 돌아왔다. 과장님의 기대어린 표정 앞에서 난 이렇게 말했다 "방법이 없대요.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루라도 빨리 새 여권을 신청하는거여서 바로 여권 신청해두고 왔어요." 이제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아무리 서둘러도 어쩔 수 없었던 3일. 출장을 적어도 3일은 미뤄야 한다고 관게부서에 연락하는 것 뿐.


큰 회사다보니 러시아 CIS 담당도 여럿이었다. 각 부서별로 한명씩. 그 중 긴밀한 연락을 담당하는 부서의 담당자에게 지역으로의 연락을 요청했다. 그리고 다급히 보내진 메일에 참조로 들어있던 나는 그 메일을 보고 한번 더 기겁해야 했다. (이미 간은 깨알만큼보다 작아져 있는 나였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안녕하세요. 이번 저희 신제품 관련 워크샵 일정을 미루고자 연락드립니다. 이번에 런칭전략그룹에 새로운 러시아 CIS 담당자가 배정되었습니다. 러시아 교환학생도 다녀온 재원입니다. 이 담당자와 함께 출장을 가기 위해 부득이하게 일정을 변경하게 되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으핫. 오마이갓. 이 일정을 바꾼 나는 출장일정을 바꿀만큼 중요한 재원이 되어 있었다. 부담의 무게는 무한계 배수가 되어 나를 눌렀다. 당연히 남은 며칠, 잠을 잘 수 없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완전히 망쳤고, 결국 보드카 '43잔 플러스 알파'로 만회해야 했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다음에 풀어봐야 할 것 같다.



이 사건은 우리 부서 사원들 모두를 회의실에 불러들이는 사태를 낳았다. "회사 생활 십년이 넘도록 여권 만료일 챙기지 못해 온 부서 일정 줄줄이 변경해야 했던 일은 처음이야." 라며 "사원들 다 여권들고 회의실로 들어와." 하셨던 것. 나는 그렇게 사소한 역사 하나를 새로 썼다. 아마 지금은 나만 기억하고 있을듯한 이 사건은 어느새 어렴풋한 추억이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보니 '그때 나 왜 그렇게 떨었지' 싶다. 지나고보니 귀여운 20대 중반 신입의 추억.


* 이 글에 이어진 "말아버린 PT와 보드카 43잔'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 링크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jsrsoda/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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