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탈랴 수도원(Mosteiro da batalha)
여행 중 어떤 공간들은 이따금 그 공간과 무관한 일상의 기억으로 각인된다. 여행이 여행이 아닌, 삶의 편린들로부터 기억되는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여행 속 본래의 공간은 어쩐지 퇴색되고 그곳에 당시의 일상이 자리를 잡는다. 바딸랴 수도원은 내게 그런 의미에서 고별의 공간이다. 철옹성 같이 닿으면 찔릴 것 같은 뾰족뾰족한 수도원. 포르투갈 독립의 결정적 계기가 된 카스티야 왕국과의 알주바로타 전투 승리를 기념하여 지어진 수도원 앞 광장에서, 나는 뻘뻘 땀을 흘리며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딸아이의 뒤를 맴맴 돌고 있었다. 그리고 알주바로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거대한 페헤이라 장군의 기마 동상 앞에서 문득 지인의 안부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오랜만이죠? 잘 지내요? 거긴 어때요?벌써 2년이 넘었네요. OO으로 가게 됐어요. 내일 저녁 비행기네요. 시간 참 빨라요. 마지막 인사나 전하려고 전화한거죠. 여긴 이제 다 정리했죠. 아무튼 잘 지내고 다음에 봐요.
먼 길을 떠나는 지인의 고별 전화였다. 뜻밖의 전화에도 의례적인 인삿말이 오갔고, 기약없는 말을 주고받고 전화는 어느덧 끊어졌다. 딸아이는 아슬아슬한 자세로 기마 동상 주위를 빙 돌고 있었다. 싱거운 문장들을 주고 받고 담담히 전화를 끊었지만, 어쩐일인지 가슴 속 어딘가가 쓰라렸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뇌보다 심장의 화학반응에 가깝다는 오래된 친구의 농담이 떠올랐는데, 나는 그것이 어쩌면 농담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게 머릿속에서는 그저 공허함뿐이었다.
바딸랴 수도원은 포르투갈 중서부 바딸랴라는 이름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지만 수도원의 모습은 결코 한적하지 않다. 압도적이고 위압적이며 전투적이고 공격적이다. 수도원에도 얼굴이 있다면 이곳은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서는 전사의 얼굴과 같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엉겹결에 이별을 했다. 같이 시간을 보낸 동료와 고별했고, 무엇보다 그 시간과 이별했다. 사람이 사라지자 시간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포르투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일컬어지는 알주바로타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주앙1세는 성모마리아의 은총을 기념하기 위해 이 수도원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이 수도원은 내게 어떤 이별을 기념하는 장소가 된다. 더이상 내게 바딸랴 수도원은 포르투갈과 영국의 동맹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 아니며, 마누엘 양식이 화려하게 가미된 곳도 아니며,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가 탄생한 결정한 계기도 아니다. 여행은 이렇게 개인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의도치않게 여행에 생명을 불어넣는 나의 방법이다.
바딸랴 수도원(Mosteiro da Batal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