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의 마지막 주말에 7남매는 어머니를 모시고 대전 현충원에 영원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버지를 찾았다. 6.25 한국전쟁에 빛나는 국가유공자라는 자부심으로 살다가 급성 패혈증으로 돌아 가신지 벌써 올해로 13주기가 된다. 이날 아버지 기일에 앞서 찾았던 아버지 묘소 앞에서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아버지 제사를 잘 지내라”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해 추석이 다가왔다. 나와 어머니가 함께 기거했던 시골집에 목포 셋째형 내외가 어머니의 바람을 이어가고자 제수 음식을 장만하여 섬으로 들어왔다. 갖가지 나물이며, 생선, 과일, 특히 아버지 살아생전에 좋아했던 한과에 이르기까지 정성 가득 준비해 온 제수(祭需)를 보신 어머니는 “며느라기가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며 연신 미소를 잃지 않았다.
솔직히 아버지와의 추억은 별로 많지 않다. 아버지는 농군으로 평생을 살면서 어머니 애를 많이 타게 했던 것 같다. 농사는 거의 어머니 몫이고 늘 하얀 옷에 하얀 구두를 싣고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던 한량이기도 했고, 사람이 좋아 빚보증을 서고 돈 없다고 나 몰라하면 고스란히 갚아줘야 했던 기억들.. 1998년 목포에서 방송강사를 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는 수시로 내게 전화를 했었다. 평소 몸이 약해 목포 의료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용돈이 떨어지면 내게 전화를 했다. “막둥아! 잠깐 의료원에 다녀 가라” 그래도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만큼 인자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셋째형 내외는 목포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내게 “항상 아버지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누가 되었든 간에 아버지 기일에 맞춰 잊지 말고 밥 한 그릇이라도 떠 놓기를 다시 한번 내게 부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