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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ep 18. 2023

지구 반대편, 더 큰 질문을 찾아서

네덜란드에서 만난 새로운 시선

2022년 8월 16일. 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나는 좋든 싫든, 적어도 5개월간은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토록 바라왔던 날인데도 떠나기 싫은 마음에 공항에서 엄마를 붙잡아 안고 엉엉- 소리내서 울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국 땅이 저 멀리 보이자 눈물은 더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내가 왜 아늑한 집을 버리고 이 비행기 안에 있을까, 도착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말이 안 통하면 어떡하지, 이전에는 무작정 괜찮을 것이라 묻어두었던 걱정들이 점점 하나 둘 현실이 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생각보다 비행 시간은 길었다. 내내 울기만 하기에는 14시간은 너무나 길었다. 나는 어느새 스르륵 잠에 들었고, 일어나니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아주 불쾌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대마 냄새였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 그리고 처음 밟는 땅.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곧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당장 큰 이민가방 두 개를 들고 기차는 어떻게 타야 하지? 가는 길에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기숙사 예약이 안 되어있으면 어떡하지? 따위의 끊임없는 두려움의 목소리가 나를 잠식해 갔다. 그렇지만 사실, 나에게는 그 두려움을 ‘온전하게’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당장 내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에 도착해야만 했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나는 아주 강한 정신력으로 결국 기숙사에 들어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모든 긴장이 탁- 풀리며 눈물이 났다.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나의 5개월간의 교환학생 생활은 시작되어버렸다. 20여년간 서울에서만 살던 나에게는 꽤나 큰 도전이었다. 처음 몇 주 간에는 참 많이 울었다. 내가 생각하던 교환학생의 낭만보다 적응하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컸다. 인도식 영어 발음을 가진 교수님 발음이 이해되지 않아 수업을 알아듣지 못하고 집에 오는 길에 엉엉 울기도 하고, 요리하는 방법을 몰라 여러 날을 굶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한 달이 지나자 이 생활에서 어떻게든 수업을 듣고, 맛있는 요리를 해먹으며 살아나가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부터일까,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을 건너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아도 선뜻 멈춰주는 차들, 마트에 갈 때마다 듣는 사소한 ‘Have a nice day!’, 문을 지나가려 때마다 법으로라도 정해둔 듯 저 멀리서부터 반사적으로 잡아주는 사람들. 아니,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여유가 넘치나! 얼마나 바쁜 사회인데! 한 명 한 명 인사하고 있을, 문을 잡고 있을 여유로울 시간이 있는가! 근데, 별로 안 어려워 보이는데, 나도 해 볼까? 애써 어색한 입술을 들썩여본다.“해브 어 나이쓰 데이!”그러면 곧 찢어질 듯한 입가의 미소를 지닌 사람의 “You too!”라는 답변을 받게 된다. 들을 때보다도 내가 말하니 기분이 더 좋았다. 문득 이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 되돌아봤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말을 한국에서 언제 해봤더라. 그저 내 갈길 가기 바빴다. 흥, 누가 나를 지나치든지 말든지. 다른 사람이 쌩 지나치는 문에 다칠 뻔한 적은 또 한두 번인가.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매 순간 조금 더 여유로울 수 있었다. 아주 조금 더 친절한 사람일 수 있었다. 이것을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 한국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 ‘여유’는 ‘빨리빨리’의 민족인 한국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도록 만들기도 했다. 주민등록증 하나를 만드는 데 3달이 걸리지를 않나, 택배 하나를 받으려면 기본 5일은 걸렸다. 카페에서 공부를 좀 하려 하면 저녁 5시에 문을 닫아버리지를 않나, 트램의 배차 간격은 기본 10분이 넘어갔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새벽배송이 되는 시대에, 5일 걸리는 택배가 웬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살아가려면 인정해야만 했다.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신기한 것은, 가만히 택배를, 트램을, 주민등록증을 기다리다 보니 새삼 ‘내가 너무 급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더 걸렸다. 사실 한국에서 나에게 오는‘빠름’은 누군가의 ‘노동’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나의 편의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을. 그러면서도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더 빨리!”라고 외치기 전에 한번이라도 그 뒤에 서있을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건, 비단 나를 둘러싼 ‘환경’뿐만이 아니었다. ‘나’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물음을 던졌다. 네덜란드에 오기 전 나는 빨리 달리는 동기들을 보며, 뒤쳐지지 않기 위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달렸다. 그저 좋은 직장에 가려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학회와 인턴을 했다. 그리고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드디어 나에게 한번도 진정으로 묻지 못했던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뭘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주변의 잡음 없이 처음으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네덜란드에 오기 전, 누군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물었던 일이 기억난다. 나는‘돈을 많이 벌어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성공한 삶’이라 답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꿀 법한 드림-카 아닌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몇 달간의 네덜란드 생활을 하면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완전히’뜯어고쳤다. 1인당 GDP가 꽤 높은 축에 속하는 선진국임에도, 내가 본 네덜란드는 참으로 검소했다. 강남을 지나다니면 5대 중 1대쯤 볼 수 있던 명품 차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명품의 본고장인 유럽인데도, 명품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명품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사람들보다 더. 어느 순간부터 나는 행복을 잘못된 곳에서 찾고 있지는 않았는가. 허상만 좇고 있지는 않았는가. 생각하다 보면 내 답변이 어쩐지 아쉽게 느껴진다. 한 번 사는 인생의 목표가 고작, 좋은 차라니. 나는 차가 아니고 사람인데! 나의 가치를 차의 가치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행복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감사하게도 이 답마저 네덜란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안에서였다. 10월이었나 11월이었나,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반 고흐 미술관에 가기 위해 혼자 기차에 올랐다. 미술관에 도착하여 입장하자 고흐의 그림들이 줄지어 보였다. 유독 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몬드 꽃>. 고흐의 37년 인생 마지막 봄에 그린 그림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가장 밝은 색채로 그려낸 ‘부활’의 아몬드 꽃나무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버렸다. 칠흙같이 어두운 삶 속에서도 사랑하는 힘을 잃지 않는 삶. 희망을 그려내는 삶.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지만, 죽기 전까지 세상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봤을 그의 희망은 어떤 것이었을까. 고흐의 그림에서 나는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이정표를 부여받았다.



네덜란드는 내 삶에 꼭 필요한 질문을 던져준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바쁜 일상을 핑계대지 않는 여유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 빨리를 외치기 전에 희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돈을 좇기 전에 진짜 행복은 어디서 오는지 치열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는가. 나는 나에게 던져온 질문들에 치열하게 답을 고민하며 5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2023년 1월 16일.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나는 좋든 싫든, 꽤나 오랜 시간 한국에서 살아가야겠지. 네덜란드를 여행했던 마음으로, 이제는 한국을 여행할 차례다. 5개월간 네덜란드에서의 삶은 내게 당연했던 것들에 물음을 던질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돌아온 이곳에서 나는 또 어떤 물음을 던질까. 어떤 대답을 준비할 수 있을까. 다만 이곳에서의 생활에 너무 빨리 익숙해지지 않기를. 가끔씩 삶의 방향성을 모를 때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세상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나’를 떠올리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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