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생명의 마지막 세계였을 나에게

by 닻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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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경험이다. 70~80년대에나 보았을 법한 낡은 골동품 TV가 며칠 전부터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로 가득한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핑-' 소리와 함께 그날의 장면이 선명하게 재생된다.


퍽 소리가 났고, 무언가가 쓰러져 있었다. 펄쩍이는 움직임과 애처로운 신음. 나는 달려갔고, 바닥은 흥건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돌리는 사이, 검은 털이 참 고왔던 아이는 비정상적인 몸짓으로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화면이 꺼지면 다시 노이즈 섞인 효과음과 함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퍽 소리, 쓰러진 몸짓, 신음. 며칠 사이 수십 번은 반복되었을 이 영상을 되감다 보니, 이제는 이것이 현실이었는지 지독한 악몽이었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는다. 사물의 이름을 반복해 읊조리다 보면 그 존재가 낯설게 느껴지는 '게슈탈트 붕괴'처럼, 생면부지였던 그 길고양이의 잔상은 내 일상을 서서히 해체하고 있었다.


충격보다 무거웠던 건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비겁한 주판알이었다.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나는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단어를 먼저 떠올렸다. 한 달 적금조차 빠듯한 처지에서, 불안한 퇴사자의 미래를 계산하던 내가 보험도 되지 않는 동물병원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생명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나는 인간이라는 비겁한 외피를 두른 채 손익을 따지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지만, 내가 직접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


나는 아직도 그 아이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생판 남이었던 존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이의 전 세계가 내 손끝에 달려 있는 듯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길 위에서,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온기가 나의 비겁함이었다는 사실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끝내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뒤돌아 나와서, 생명의 가치보다 주머니 사정을 먼저 계산해서, 너의 마지막을 외롭게 둬서. 이 모든 고백은 결국 닿지 못할 메아리일 뿐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머릿속의 낡은 TV가 지직거릴 때마다 눈을 감지 않고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뿐이다.


비겁했던 그날의 나를 억지로 지워내지 않기로 한다. 대신 그 씁쓸한 장면을 마음 한편에 고이 접어둔다. 다음에 마주할 어떤 생명 앞에서는 적어도 주판알을 굴리는 시간보다 손을 내미는 시간이 더 빠르기를 바라며.

그곳에서는 마음껏 뛰어놀기를.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누군가의 온기 속에서 아주 천천히, 다정한 이름으로 불리며 늙어가기를 빌어본다. 나의 비겁함이 머문 자리에, 이제는 아주 작은 평온이라도 깃들길 바라며 낡은 TV의 전원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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