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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May 22. 2024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재회

섣부른 판단은 모양 빠지게 한다.

풋풋한 20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다. 2년간 사귄 남자친구와 또 한 번의 이별을 하게 됐다. 이 남자하고만 167번째 이별인 듯하다. 사귀고 맨 처음 헤어짐을 고할 땐 슬픔을 잔뜩 머금은 채 믿지 못하던 그였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귀고 헤어짐을 반복하다 보니 헤어지자는 말에 이골이 난 듯했다.


"우리 헤어져. 도저히 안 되겠어. 이제 진짜 그만하자."

"응,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는 너는 헤어져 나는 아니니까의 의미가 함축된 표현이다. 항상 이별을 언급하는 쪽은 나였지만 관계의 깊숙한 내면에는 남자친구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별은 어림도 없는 남자친구가 내 기분을 맞춰주면 마지못해 다시 관계는 이어졌다. 이런 패턴 때문인지 남자친구는 자기가 붙잡으면 내가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언제나 있었고, 정신이 번쩍 나게 할 심산으로 내뱉는 이별이라는 무기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남자친구는 첫눈에 나에게 반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믿을 것이다. 연애에서 나는 언제나 우위를 차지했고 그는 뭐든지 나에 대해 맞출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1부터 10까지 맞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트렌디한 걸 좇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 나와는 반대로 그는 유유자적한 삶을 지향하는 선비 같은 무미건조한 남자였다. 내가 가는 대로 쫓아다니느라 그는 피곤해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맥이 풀려 짜증이 났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오래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한 채 억지로 끈을 이어왔다. 결국 166번쯤의 재회를 끝으로 167번째쯤의 헤어짐을 고하며 남남이 되기로 했다.

솔로가 됐다는 소식을 167번째쯤 친구들에게 전하자 모두 믿지 않았다.


"나, 오빠랑 진짜 헤어졌어."

"응, 한 달 뒤에도 헤어져있으면 그때 믿을게. 한 달 뒤에 다시 얘기하자"

 

헤어진 지 2주가 지나고 3주 차가 됐다. 3주 차가 돼도 그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정말로 헤어졌구나 실감 났다. 지긋지긋한 관계가 끝이 나자 속 시원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미련이라는 못난 내 마음이 질척대기 시작했다. 연락이 언제 올까 싶어 핸드폰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헤어진 지 한 달 무렵 드디어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가 그럼 그렇지.)


"여보세요"

"잘 지냈어? 뭐 해?"

"그냥 있어, 왜 전화했어?"

"나 고기 먹고 싶은데 혼자 먹기가 그래서 같이 갈래?"

"글쎄....... 굳이 왜 나랑?"

"나와, 투뿔 한우로 몸보신하자. 사줄게."


사진출처 : www.pexels.com

솔직히 나 없이 잘 살고 있었을까 궁금도 했고, 다시 잘해보자 하면 이번에도 마지못해 자존심 챙기고 그래줘야지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한 달의 시간이 둘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었지만 첫 데이트 때처럼 설레기도 했다. 남자친구도 태연하게 행동하며 고기를 열심히 구웠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기대감 없이 젓가락을 들었지만 역시 투뿔 소의 맛은 눈이 번쩍 뜨이도록 남달랐다.


"다음엔 더 맛있게 구워줄게."


'다음엔'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래 올 것이 왔구나.


"다음에 또 만나자고?"

"응? 아니, 2인분 더 시키게. 여기 2인분 더 주세요."


재회의 기대를 생각하고 나간 나란 여자는 자존심을 세우기는커녕 모양만 빠진 채 소주나 한 잔 들이켰다.


아이, 쪽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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