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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Jun 20. 2024

님아, 수건 좀 잊지 마오.

여행지마다 꼭 챙겨야 할 필수품이 있다

이 글은 자꾸 깜빡하는 나를 위해 글을 쓰는 행위로 기억력을 높여보고자 적어보는 자기 반성문이다.


어딜 떠날 땐, 짐을 챙기는 건 나의 임무다. 여행을 가서 무언가 빠트리고 갖고 오지 않았다는 건 곧 식구들이 겪어야 할 불편함으로 귀결된다. 항상 하나씩 빼먹는 물건은 현장에서 비싸게 사야 하거나 굳이 안 사도 될 것을 더 사서 집안에 짐을 하나 더 들이게 되는 그런 것들이다. 그게 아니면 A라는 물건을 갖고 왔어야 했는데 B를 챙겨 온 어이없는 실수다. 제대로 물건을 챙겨 오지 않았을 때 식구들 입에서 터지는 김 빠진 사이다의 탄성과 원망의 눈초리를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한숨과 토로가 오래되면 인내심은 곧 바닥을 드러내고 그런 소리 하나하나가 부싯돌이 되어 순간 얼음이 된 몸과 마음은 단번에 녹아 끓는 물의 온도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 역시 엄마야. 엄마가 또 안 갖고 왔어."

"아.... 그걸 안 갖고 오면 어떻게 해? 거길 한 두 번 가?"

"어떡해 우리. 이래서 엄마를 믿는 게 아니야."

.

.

.

"그렇게 잘났고 똑똑하면 앞으로 너희들이 네들 짐 챙기면 되겠네!"


기분 좋게 온 여행인데 한 순간의 화로 분위기가 다운된다.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고 불만 가득한 아이들 입을 닫게 만드는 건 엄마의 성난 큰 목소리뿐이다. 그저 "엄마가 깜빡했어. 미안해."라고 잘못을 인정하면 끝일 텐데 어른 자존심에 생채기 나는 게 뭐 대수라고 못난 방법까지 동원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한 마음은 가득이고 좀처럼 해결 안 되는 깜빡증은 나 자신을 스스로 구덩이에 파묻는 느낌을 준다. 내 실수 하나로 식구 세 명이 불편함을 겪어야 한다 생각하면 가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깝깝해진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고 까먹지 말자, 까먹지 말자 속으로 되뇌면서도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나 그곳을 다시 갈 계획이 생기면 새하얗게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가 반복이 되고 만다. 


특히 워터파크에서는 나의 실수가 치명적인 불편함이 따라온다. 워터파크 갈 때에는 챙겨야 할 필수품이 은근히 많다. 필수품을 하나라도 빠트리고 오게 된다면 현장에서 바가지요금을 지불해서라도 사야 하고 돈으로 해결이 안 될 땐 당혹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약이나 속옷을 빠뜨리고 왔다면 근처 약국이나 대형 마트에서 세일하는 제품으로 바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깜빡함의 죄책감은 덜하다. 하지만 워터파크에 도착해서 수영모나 워터슈즈를 빼먹고 안 갖고 왔을 때는 나의 멘털이 털리는 건 기본이요, 식구들이 한숨을 한 번씩 내쉴 때마다 땅이 아래로 꺼져가는 기분이 든다. 차라리 땅으로 꺼져 내가 매몰당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해변으로 물놀이를 계획하고 떠났다. 아이들도 조개, 게, 물고기를 잡겠다고 기대감으로 꽉 차 있었다. 큰 아이는 물안경과 오리발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바다에 도착했을 땐, 가방을 수십번 뒤적거려도 물안경은 나오지 않았다. 속상한 큰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남편은 근처 편의점에서 급한 대로 거금 2만 원을 주고 이름 없는 물안경을 와 속 쓰린 기억이 있다. 이 날 이후로 물놀이를 가게 되면 항상 머릿속에 다른 건 몰라도 물안경을 꼭 챙기자고 각인을 시켰었다. 문제는 다음번이었다. 물안경을 챙겨 워터파크에 도착했고 입구에 들어가는 찰나 워터슈즈를 챙기지 않은 걸 알게 됐다. 까끌까끌한 워터파크 바닥을 우리 4 식구는 맨발로 8시간을 누비며 물살에 넘어지면 발이 까지는 고생을 해야 했다. 마음의 짐을 한껏 이고 온 이후로 세 번째 물놀이 여행은 물안경과 워터슈즈를 챙겼으나 사이즈만 다른 똑같은 디자인의 워터슈즈가 있다는 걸 주의깊게 보지 못하고 사이즈 한 짝씩을 챙겨 남편이 맨발로 다니는 상황이 됐다. 신혼시절 남편과 커플로 맞춘 아쿠아슈즈를 내가 새 아쿠아슈즈를 사게 되면서 신지 않게 됐고 눈대중으로만 보고 265 사이즈 한 짝과 230 사이즈 한 짝을 세트로 챙겨 온 것이다. 230 사이즈 아쿠아슈즈의 뒤꿈치를 접어 신고 씩씩 거리며 나오는 남편의 눈에서 이미 나는 저격당해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만하면 치매인지 건망증인지 대충 사는 건지 정의하기 힘든 애매한 정신상태에 현타가 왔다. 자꾸 이런  자신에게 화가 나고 집 밖을 나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실수 끝에 선크림, 수영모, 수경, 물총, 워터슈즈, 수영복, 샤워타월 등 물놀이 용품을 한꺼번에 모아둔 여행 가방을 만들어 놓게 됐다. 물놀이 전용 가방 하나가 만물장수의 트럭짐칸처럼 없는 것이 없는 만능치트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이들 성화로 오션월드를 가게 된 어느 날, 그곳은 한 가지 준비물이 더 필요한 곳 인걸 알게 되었다. 사우나 시설이 완비된 워터파크에선 무료로 수건이 제공됐었는데 이곳은 유료였던 것이다. 장당 1,500원으로 두 장을 요구하면 3천 원을 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수건을 결제하고 씻고 나왔던 씁쓸한 경험이다. 남편도 두 아이들과 수건값을 아끼려 2장만 빌렸고 남편은 아이들 닦아주고 난 축축한 수건으로 대충 씻고 나왔다고 했다.

물과 친하지 않았던, 남들과 함께 옷을 벗고 씻는 것이 불편했던 나로서는 워터파크를 결혼 전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아이를 위해 가기 시작한 워터파크가 인생의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꽤나 낯선 준비물이었다. 아이들과 떠날 땐 미리 검색도 해보고 준비를 철저히 했었어야 했는데 극강의 파워 P성향의 엄마는 단순무식하게도 털털한 준비로 아이들과 떠났던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완벽을 꿈꾸고 싶었지만 성실하지 못한 나의 성향과 정신머리가 매번 남편과 아이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했고 부족한 엄마와 아내의 이미지는 이제 그들의 뇌 속에 점점 각인이 되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올해 현충일이 목요일이 되면서 금요일은 재량휴교일로 정해졌다. 남편 또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며 휴가를 냈다. 30도가 웃도는 더운 날씨에 맞춰 오랜만에 오션월드로 떠났다.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미리 준비되어 있는 만능치트기 물놀이 가방을 꺼내 빠진 물건은 없는지 한번 더 살펴보았다. 수영을 배웠던 큰 아이는 수영전용 풀장에 들어가서 연습을 하기 때문에 캡모자 외에도 수영모를 꼭 챙겨야 했다. 큰 아이 수영모도 챙겼고, 뜨거운 햇빛에 대비해 새로 산 선크림과 목을 덮어주는 수영모자까지 덤으로 챙겼다. 워터슈즈도 사이즈 확인해서 남편용으로 챙겼고 여러 번 준비물을 되짚어 살펴봤다.

워터파크에서 먹을 과일도 깎아 도시락통에 담고 아이들이 수시로 마실 음료수와 물도 보냉가방에 아이스팩까지 끼워 살뜰하게 짐을 쌌다. 아이들을 깨워 씻을 동안 차에서 먹을 아침 먹거리를 준비했다. 모든 게 수월하고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여유로운 김에 텀블러에 얼음을 담고 캡슐 커피를 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만들어 차에 탔다. 음악도 좋고 커피맛도 좋고 100점짜리 준비었다.

차창 밖 초록이가 무성한 산만 바라보기를 1시간쯤 지났을까 문득 불안한 기운이 음습하게 내 얼굴에 드리워졌다. 


"남편, 혹시 수건을 돈으로 빌려야 했던 곳이 오션월드였을까?"

"아, 맞아! 안 챙겼어?"

"응. 어쩌지?"

"이그, 엄마 이럴 줄 알았어."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 인터넷으로 한 번만 검색해 봤으면 됐을걸 또 가슴을 치고 후회한다. 이렇게 또 내 빈틈을 보여주는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이소라도 있음 사겠는데 갈수록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런 운조차 맞닥뜨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수건을 안 갖고 오는 사람은 나뿐일까라는 생각에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주변에 수건을 파는 건 어떨까 염치없는 상상도 해본다. 수건을 장당 1500원에 빌려주니까 난 얼마에 이걸 팔아야 할까 잠시 머리가 다른 쪽으로 관심이 기운다. 3장씩 묶어 3천 원에 팔면 될까 하다가도 인건비에 재료비 이곳에 와 팔려면 차를 끌고 와야 하니 기름값까지 밑지는 장사가 분명하다는 결론만 내렸다. 오션월드에 도착해 차에 내리고 보니 뒷좌석에 아이들이 덮는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 담요를 이따가 워터파크에서 추울 때 덮고, 아이들 샤워타월로 샤워하고 쓰는 거 어때?"

"그래, 그럼. 우리는 남자니까 휘뚜루마뚜루 대충 닦으면 되니까 너만 수건 빌려서 닦고 나와."


죽으라는 법은 없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았던가. 기발한 생각에 무거워진 마음을 한 줌 가볍게 덜어내고 이런 억지스러움을 토 하나 안 달고 받아준 남편한테도 내심 고마웠다. 4 식구 모두 썬배드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재미를 더하고 폐장을 알릴 때까지 물놀이를 즐겼다. 시간과 약속한 장소를 정하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수건을 빌리러 요금표를 보니 역시 장당 1500원이다.  사우나에서 무료로 지급되는 2장의 수건도 부족하다 생각하며 아쉬운 대로 쓰고 나왔는데 돈을 내려니까 두 장도 괜스레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가계부를 쓰고 있던 터라 경제관념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 써도 될 돈을 쓰게 되어 1장 값만 계산하고 부족하지만 아쉽게 샤워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이 둘까지 챙기며 자기 몸 챙기지 못할 남편이 걱정되어 서둘러 씻고 나와 기다렸다. 아이들이 한 명씩 젖은 머리칼로 나오는 걸 보니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짐을 들고 나온다. 커다란 샤올 타월은 세 사람의 몸과 머리의 물기가 닦여진 후라 습기를 완전 머금고 무겁게 늘어져있었다.

세 사람의 몫을 감당해야 했던 묵직해진 샤워타월을 보며 '오션월드 갈 땐, 수건 챙기기'를 마음속으로 되뇌어본다. 만 번쯤 되뇌면 장기기억에 저장될까. 부족한 엄마와 아내 덕분에 고생스러울 텐데 남편과 아이들은 방금전에 겪었던 불편함을 금새 잊은 듯 하다. 

1500원짜리 수건 하나가 나를 완벽에 가까운 사람으로 되고 싶게 만드는 동기가 되다니 이보다 저렴하면서 효과있는 교육비가 어디 있을까.

오션월드 갈 땐 수건 챙기기. 잊지 말기로 하자.

제발 오션월드 갈 땐 수건 좀 잊지 마오.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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