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단위의 모의고사(모의 학력평가)가 실시 중이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전 학년이 하루 일괄적으로 시험을 쳤겠지만 지역에 따라 1/3, 2/3 등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년별로 3일에 걸쳐 시험을 치게 되었다.
내가 근무하는 고등학교는 2학기 개학 이후 2/3 등교(3학년은 등교 수업, 1, 2학년은 격주로 등교)를 이어가고 있다. 오늘은 1학년이 모의고사를 치고, 2학년은 집에서 원격수업, 3학년은 교실 수업이다. 모의고사 시간표와 수업시간표가 따로 운영되고, 교사들은 보통 2개 학년을 걸쳐 교과를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교실 수업했다가 실시간 온라인 수업했다가 정신이 없다.
학교 출근하면 보통 집안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오늘만큼은 둘째 아이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여서 하던 일도 멈칫멈칫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이후로 둘째가 오늘 첫 등교를 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고등학교는 1/3 등교로 2학기 개학 이후 3학년만 등교를 하고 1, 2학년은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했다.
한국을 떠난 지 4년 반 만에 돌아와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로 편입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지금껏 집에만 있다가 처음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자마자 시험이다. 며칠 전부터 둘째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엄마, 한국은 시험 치면 등수가 나온다던데... 나, 꼴찌 하면 어쩌지? 설마 꼴찌는 아니겠지?"
첫 등교하는 날의 시험을 앞두고 걱정하는 딸과 나눈 카톡
'(꼴찌를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OMR카드를 사용해본 적도 없는 둘째가 답안지나 제대로 작성할지, 한글인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로 된 시험문제 앞에서 혼자 눈물을 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딸에게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해놓고선 정작 나 자신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하노이에서 둘째가 국제학교에 첫 등교하던 날도 그랬다.
여러 번 떨어지고, 수개월의 벼락치기 영어공부 끝에 겨우 들어간 국제학교였기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받으며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되는 바였다. 역시나, 등교 첫날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엉엉 소리 내며 폭풍 눈물을 흘렸더랬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엄마를 보자마자 터진 것이다.
4년 전 그날을 떠올리니 오늘도 혹시 그럴까 봐 걱정되는 마음 한편으로 아무렴 그때보다야 낫겠지 싶었다.
'낯선 곳이라 해도 말 통하는 한국이고, 이제 철부지 초등생이 아니라 의젓한 고등학생인데...'
그래서 모름지기 '시련'은 '성장'의 밑거름인 것이다. 둘째가 베트남에서 맞닥뜨렸던 어려움을 잘 이겨낸 만큼 이번에도 꼭 그럴 거라며 걱정하는 나 자신을 다독였다. 다만 오늘은 4년 전 그날과 달리, 학교에서 돌아오는 둘째를 안아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어젯밤, 큰딸에게 전화를 했다(사실 둘째가 걱정되어 요즘 거의 매일 저녁마다 화상통화를 한다). 오늘 첫 등교하는 둘째가 챙겨가야 하는 준비물이며 학교 가서 해야 할 것들을 동생에게 한번 더 일러주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첫째에겐 미안하지만 어쩌랴, 당분간 엄마, 아빠 대신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을.
일어나 아침도 못 챙겨 먹고 출근하는 줄 뻔히 알면서 동생의 등교 준비를 부탁하려니 어찌 미안하지 않을까. 그런데 돌아오는 딸의 쿨~한 대답에 조심스레 말하던 내가 오히려 머쓱해졌다.
"응, 알았어. 나 내일 연차 냈으니까 괜찮아. 일찍 깨워서 챙겨 보낼게. 엄마는 걱정하지 마~"
계약직 연구원으로 회사에 들어간 지 이제 겨우 한 달 된 신참이 연차를 내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래도 되냐고 되물으니 '한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당연히 써도 되지'하며 아주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상포진에 걸려도 4년 반 만에 복직한 직장이라 병가도 쓰지 않고 꾸역꾸역 출근하는 엄마와는 확실히 다르다.
'당돌함'과 '당당함'이 한 끗 차이일 수 있겠다는 혼자 생각을 잠시 하다가 딸의 연차가 '혹시 둘째 때문에?' 하는 의문이 일었다. 둘째를 걱정하는 엄마 마음을 알고? 아니, 어쩜 동생의 보호자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서??
동생보다 7살 많은 언니의 엄마 역할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10년도 훨씬 전, 아이들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에 출근해서, 잠들고 난 뒤 퇴근할 때가 더 많았던 엄마였기에, 첫째는 초등학생 때부터 동생의 방과 후 돌봄을 일정 부분 책임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을 아는 가까운 사람들은 '큰딸은 성격이 똑 부러지고 매사에 적극적인데, 둘째는 너무 순하고 착하기만 해서 걱정'이라고 얘기한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그렇고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우리 둘째에게도 가족들만 아는 반전 측면이 있다.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생떼를 쓰는가 하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선수이기도 하다. 물론 가족들 앞에서만 그렇다. 태어나면서부터 약하다 보니 과보호된 탓도 있겠지만, 우리는 타고난 기질도 한몫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부디 앞으로는 그 못 말리는 자기만의 고집을 긍정적으로 승화해주기 바라마지 않지만, 아직까지는 우리 가족을 때때로 힘들게 하는 게 사실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어릴 때의 생떼 쓰기와는 또 차원이 달라져서 엄마인 나도 감정을 추체 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막무가내 성질부리기의 주대상은 가장 만만한 '엄마'였을 뿐, 자매는 베트남과 한국으로 4년 넘게 떨어져 살았으니 그저 애틋하고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이제 자매 둘만 살다 보면 동생이 때때로 엄마한테 부리던 성질을 언니한테 쏟아낼 때가 있을 텐데, 아무리 너그러운 언니라 해도 참아내기 힘들 것이다. 괜히 둘이 같이 살다가 의좋은 자매 사이에 균열만 생기는 것은 아닌지 불안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둘이 서울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 지 이제 한 달 보름 정도 되었다. 가끔 첫째가 전화로 말 잘 안 듣는 동생에 대한 푸념은 하지만, 다행히 못 살겠다 정도는 아니고... 아직까지는 서로 의지하며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는 듯 하니 다행이다.
오늘 퇴근하는 길에 바로 둘째에게 전화를 했다.
첫 등교는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학교에서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둘째를 엄마 대신 언니가 맞아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동생을 위해 연차까지 쓴 큰딸이 고맙고 기특하기까지 했다.
"딸~ 어디야? 학교 마치고 집 가는 중이야?"
"아니, 벌써 집에 왔는데?"
아이 목소리가 밝은 걸 확인하니 우선 안심이 되었다.
"그럼, 언니랑 둘이 뭐 하고 있었어?"
"언니는 집에 없는데~"
"????!!!!"
<나의 착각>
1. 오늘 하루 종일 둘째 때문에 속을 태우며 혼자 울지나 않는지 별의별 상상을 다했건만, 엄마라는 사람의 지나친 걱정이었을 뿐이다.
2. 학교에서 지쳐 돌아오는 동생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언니, 동생을 위해 연차를 냈다는 생각에 나 혼자 감동하고 가슴 뭉클했었는데... 첫째는 가을 옷 쇼핑하러 나가고 집에 없었단다.(첫째 말로는 둘째가 학교 마치면 당연히 자기한테 전화할 줄 알고, 전화 오면 밖에서 만나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갈 생각이었다나?)
첫 등교에 시험은 다 망쳤다고 말하면서 울기는커녕 목소리가 해맑은 둘째,
동생 챙길 땐 챙기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내 볼일은 본다는 첫째.
내가 바라던 모습이긴 한데... 뭔가 찜찜한 이 기분의 정체는 뭘까??
첫째의 우쿨렐레와 둘째의 전자피아노. 언니는 동생의 음악공부를 위해 좁은 오피스텔 한 견에 자리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