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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Oct 05. 2020

아버님 제사, 저희가 지낼게요!

나에게 제사란?

노자가 강물을 최고의 선이라고 한 이유 세 가지 중 하나가 부쟁(不爭)이다. 물은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흐르는 물은 선두를 다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큰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지나가며, 웅덩이를 만나면 다 채우고 난 다음 뒷물을 기다려 앞으로 나아간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쟁(爭)은 전(戰)과 다르다. 전(戰)은 적과 맞서서 싸우는 것이고, 쟁(爭)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때 일어나는 갈등을 의미한다. 전(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쟁(爭)은 방법의 문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다.  
                                                                                 
-신영복 교수님의 마지막 강의, 『담론(談論)』에서



코로나 19가 가져온 유래 없는 비대면 추석으로 주부들의 '명절 스트레스'도 많이 줄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실제 내 주변의 친구나 직장 동료들도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거나 시댁을 가지 않고 연휴 동안 푹 쉴 수 있게 되었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추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브런치에도 추석과 관련된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어 관심 가는 몇몇 글을 읽던 중, 댓글이 엄청 많이 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들어가 보니 명절 차례 문화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적은 글이었는데 댓글이 이어질수록 분위기가 과열되고 갑론을박 논쟁이 뜨거웠다. 브런치에서는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댓글을 쓰는 경우가 그리 흔치 않은데 '명절문화, 차례'라는 이슈에서 성역할과 차별 등의 예민한 문제를 건드리다가 급기야 혐오성 발언까지...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배려의 언어로 비판과 토론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까지 오가는 댓글의 상황이 안타까운 한편으로, 덜컥 겁도 났다.

'브런치에서 이렇게 댓글 공격을 당한다면 글쓰기가 무섭겠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에 살짝 고민이 되었다. 나도 '명절 차례'에 대한 글을 썼다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엄청 공격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이내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엄청난 공격을 받으려면 우선 내 글이 브런치 메인에 노출이 되거나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내 이야기와 생각을 맘껏 적어보기로 한다.



제사: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
차례: 음역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어머니, 아버님 제사 저희가 가져갈게요"

추석 2주 전 주말, 시댁으로 찾아간 우리 부부는 시어머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남편에게도 내가 먼저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던 터였다.


결혼한 지 25년 차.

결혼 초기 명절날 시댁에서 시조부모님 차례를 준비할 때,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왜 나는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시댁 조상님의 차례 준비를 하고 있는지, 우리 아버지의 차례 준비를 하러 가면 왜 안되는지...  대한민국의 여느 며느리들처럼 명절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그런 며느리의 마음을 아시고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아버님은 명절 차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명절 차례는 간소하게 지내거나 안 지내도 상관없지만, 평소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여 맛있는 음식 나눠먹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잔치'로 여기면 된다고. 그래서 명절이 다가오면 시어머니에게 음식을 간소하게, 많이 하지 말라고 당부하시곤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시어머님의 명절 음식은 간소화될 줄 몰랐고, 시아버님은 그에 대해 또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10년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시아버님의 제사와 명절 차례만 지내는데, 시어머님의 음식 장만 스케일이 아버님 생전보다 훨씬 커지셨다. 아버님 살아계실 때는 시어머님이 그나마 아버님의 눈치를 보신 거였다는 것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시아버님은 무척 가부장적이시고, 어머님은 절대 순종, 헌신하는 스타일이셨다. 까다로운 아버님 성격을 어떻게 다 맞추며 평생을 사셨을까 놀랍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아버님 돌아가신 후에야 우리 어머님의 보수적 사고방식과 고집이 아버님보다 한 수 위임을 알되었다.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랬던가. 아버님에서 어머님으로 권력 서열이 바뀌니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초저녁에 지내던 기제사는 자정을 지나서 지내게 되었고, 제사나 차례를 위한 음식의 가짓수와 양도 점점 늘어났다. 결혼 초기에는 어머님이 대부분 다 준비하시고 나는 옆에서 조금 거드는 정도였지만, 결혼 연차에 비례하여 노동량이 가파르게 증가하다 이제는 그 비중이 역전되기에 이르렀으니...


나는 왜 자진해서 시아버님의 제사를 가져가겠다고 했을까?


첫째, 시어머님 때문이다.

어머님에게 제사는 무척 소중한 의식으로, 어머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기울여 격식을 갖춘 제사, 차례상을 준비하고 싶어 하신다. 평생을 통해 형성된 어머님의 생각이 쉽게 바뀔 리 없다. 그런데 두 달 전 어머님은 허리 수술을 받으셨고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시다. 내가 모든 준비를 다 하겠다고 하여도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면 시어머님은 결코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다. 시어머님이 무리하시다 수술한 부위가 덧나기라도 하면 가까이에서 돌봐드려야 하는 우리 부부가 더 힘들어질 테니 어떻게 보면 제사를 가져오는 것이 나의 고생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제사를 가져오면 시아버님의 말씀처럼 '간소한 차례상'을 점차 현실화할 수 있다. 주도권이 내게 있으니 나의 정성대로 지내면 되는 것. 설령 시어머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까지는 나도 어쩔 수 없다. 어머님도 며느리에게 넘겨주실 때는 마음을 한 번 내려놓으시겠지.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혼이 있다면 명절 차례와 같은 형식은 필요 없으니 어머님과 함께 가족끼리 즐겁게 보내라 하실 것 같지만, 살아계신 어머님의 뜻을 먼저 헤아려드려야 하는 자식 된 마음이기도 하다.


둘째는 시아버님에 대한 추모의 마음 때문이다.

차례나 제사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기 위한 의식으로, 어떤 형태이든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의식의 형태는 나라, 민족, 종교 등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고, 또 시대에 따라 변해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추모의 마음을 담고자 하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인연으로 함께 했던 15년(시아버님과 나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한 번 쓰려고 한다).

50대 초반에 이른 퇴직을 하시고, 집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하셨던 시아버님. 그런 시아버님은 어머니와 함께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두 손녀를 돌봐주셨다. 세 시누와 남편에겐 그토록 엄격한 아버지셨지만, 손녀들에겐 더할 수 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할아버지셨다. 손녀들을 돌보면서 당신 육신의 아픔을 잊으시는 듯도 했다. 첫째가 중1, 둘째가 7살 되던 해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도 아버님은 우리 아이들을 찍은 사진, 동영상 테이프를 정기적으로 만들어주셨다. 우리 부부가 직장 생활하느라 아이들이 자라는 예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며 틈틈이 찍고 정리해두신 것이다.


둘째 아이를 조산하여 둘째가 오랜 기간 인큐베이터에 입원하고 있을 때, 초등 1학년이던 첫째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때도 아버님은 첫째를 맡아 주셨는데, 시댁에서 차로 30~40분 거리에 있는 아이의 초등학교까지 수개월을 매일같이 운전해서 등하교를 시켰다.


그런 아버님의 자식, 손녀 사랑을 쉽게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희미해질 우리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얼마나 큰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주셨는지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자신이 큰 사랑을 받고 자란 만큼 다른 이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에겐 아버님을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제사를 가져가겠다고 하니, 어머님 마음은 다소 복잡하신 듯했다. 당신을 걱정해서 손수 제사를 지내겠다는 며느리가 고마운 한편으로 부담을 지우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하고, 지금껏 지내오던 남편의 제사를 며느리 손에 넘긴다는 것이 못내 서운함도 있으셨으리라.


"니 몸도 안 좋은데 어째 다 준비할래... 부침 전도 시장 가니까 잘해놓고 팔더라. 조금 사서 쓰고, 음식 많이 한다고 애쓰지 마라"

어머님의 화법은 경험 상 조심해야 할 때가 많다. 표현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되고 항상 그 표현의 이면을 잘 살펴야 하는데, 이번만큼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았다.

"예~ 어머니.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정성껏 준비할 테니, 나중에 가서 딴 말 하시면 안 돼요"


나이가 이렇게 먹어도 사람 마음이란 게 청개구리 같은 구석이 있나 보다. 시어머니, 남편 등 다른 누가 나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시켰다면, 나는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시어머니가 차례상에 뭐 하나 빠뜨리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은근한 압력을 주셨다면, 차례상을 아예 맞춤하거나 완제품을 사서 차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판단하여 지내기로 했고, 또 어머니가 며느리 힘들까 봐 줄여서 하라고 하시니, 처음 지내는 이번 추석 차례만큼은 시어머니가 하시던 방식에 최대한 맞추어 준비하기로 했다. 음식은 손수, 그러나 양은 적게.

 

이번 추석, 우리 집에서 준비한 차례상


이번 추석 차례 준비는 남편, 딸들과 다 함께 했기에 힘들지 않고 즐거울 수 있었다. 시댁에서 지낼 때 소파에 누워 TV를 보던 남편이 이번엔 나물 및 야채를 다듬고, 제기를 닦고 집안 청소와 정리정돈을 담당했다. 큰딸은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했으며, 작은 딸은 음악 담당으로 우리가 일할 때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그래서 우리는 둘째를 베짱이라 불렀다).

시어머니는 우리가 준비한 차례상을 보고 '이러면 됐다. 고생 많았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명절 차례부터는 음식을 대폭 간소화하기로 남편과 얘기를 했는데, 기존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잘 먹는 음식 위주로 2번 이상 먹지 않을 양만 만들기로 했다. 시아버님 기제사 때는 시누 가족들까지 다 모이는 만큼, 손녀들이 돌아가며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낭독한다거나, 아버님 생전의 사진을 편집, 영상 자료로 만들어 다 같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전에 시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님을 추억하는 '산자의 즐거운 잔치 한마당'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제사를 가져오면서 '부쟁(不爭)'을 생각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면 갈등이 일어나는 법. 쟁(爭)은 방법의 문제로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다.


나는 지금,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중시하시는 '시어머님이라는 산'을 천천히 돌아서 가며 현명한 조정의 방법을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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