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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Oct 12. 2020

자기 자신과 만나, 다시 사랑하렴

학생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

선생님! 좀 도와주세요. A가 지금 너무 힘들어해요.   
A 아내가 그만...



20년 전 담임했던 제자 B가 새벽 3시에 카톡 문자를 보내왔다. 아침에서야 문자를 확인한 나는 한참을 멍하니 폰만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A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니...



2000년, 함께여서 행복했던 우리


전 세계가 열광했던 밀레니엄 2000년.

나의 교직인생에서 무척 특별한 해로 기억한다. 여중에 초임 발령받아 4년을 근무하고, 고등학교로 이동하여 공고에서 담임을 맡은 첫해였다. 공고 남자반엔 더러 거친 아이들도 있건만, 그 해 내가 맡은 1학년 우리 반은 담임의 말을 참 잘 따라주던 예쁜 녀석들이었다. 당시 나 또한 아침 출근이 기다려질 정도로 설레고 행복했던 '열혈 교사' 시절이다.


공고는 인문계와 달리 보충수업이나 야간 자율학습도 없고, 대입시험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학교 마치기가 바쁘게 학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아이들이 없다 보니 우리는 방과 후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 희망에 따라 모둠(조)을 나누고 학급운영을 모둠 활동 중심으로 했는데, 방과 후 모둠 상담 때는 과학실에서 라면을 함께 끓여먹고, 운동장에서 모둠 대항 체육 시합도 즐겨했더랬다. 아이들은 모둠 일기에 자기 내면의 얘기를 차츰 꺼내놓기도 했고, 다양한 학급 행사로 어울리다 보니 서로 끈끈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1년을 마무리하면서, 일 년간의 학급활동과 사진, 모둠 일기를 정리하여 학급문집, 디지털 앨범( CD)을 만들었다.(보통은 책으로 만드는데 우리 반이 전자과여서 아이들의 실력을 십분 활용하여 만든, 당시로는 앞서가는 시도였다)

전자앨범 형태로 만든 2000년 학급문집 CD

함께여서 많이 웃고 행복했던 추억들이 언제나 영원할 것처럼, 시간이 멈춘 듯 그 앨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매사 긍정적, 적극적이던 제자 A

A는 외모도 준수하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는 또 얼마나 싹싹하게 잘하는지. 아들이 여럿이면 그중에 딸처럼 살갑게 구는 아들이 있듯이, A가 꼭 그랬다. 무뚝뚝한 녀석들과 달리, '쌤 최고예요. 힘내세요' 이런 말도 곧잘 해주었고, 졸업을 하고도 자주 연락하는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동기들보다 일찍 결혼을 하며 예쁜 웨딩사진을 내게 보내주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교사된 보람을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제자였다. 아들, 딸 쌍둥이를 낳았다는 소식까지 들은 후 소식이 좀 뜸해졌지만, 아이 키우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거니 했더랬다.  


불만 투성, 소극형 제자 B

B는 A와 달리 학창 시절엔 약간 안티 기질이 있는 학생이었다. '다른 반은 하지 않는, 별 귀찮은 학급 행사를 다 하네'하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참여할 때도 있었고, 모둠 일기에 자신의 그런 마음을 슬쩍 비추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담임에겐 조심스러운 학생이었는데, 긍정적이고 활달한 A가 B 옆에서 잘 챙기고 맞춰 주었다. B가 큰 마찰 없이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었던 건 A의 도움이 컸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 B가 졸업하고 10년쯤 지난 어느 날 뜻밖에 연락을 해왔다. 의외였다. B는 담임이었던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여러 군데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고 있었다. 인 기피증이 생기고 절망감에 빠졌을 때, 문득 우리가 만들었던 학급앨범 CD가 생각나서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10년 전 담임을 찾아오게 되었다고.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기억하고 찾아와 준 B가 무척 고마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따뜻한 밥 한 끼 사주며 그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 얘기를 들어보니 엇보다 자존감이 바닥상태라 안타까웠다. 그래도 나에게 자신의 얘기를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졌는지 한결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그 뒤로 잘 견뎌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전해주더니, B는 결국 대학가의 치킨집 사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무렵 A는 결혼해서 아이 키우느라 소식이 뜸해질 즈음이었는데, 대신 B가 종종 연락을 하며 A와 다른 동기들의 소식까지 전해주곤 했었다. 내가 베트남에 있는 동안에도 스승의 날이나 명절이면 B가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왔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면 자신이 운영하는 치킨집을 꼭 방문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B, 나도 예쁜 화분이라도 사들고 깜짝 방문을 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올 7월 한국 들어온 이후로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고, 대상포진까지 걸려 고생 중이었던 터라 B에게 한국 들어왔다는 연락조차 못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들은 제자의 소식이...

B가 새벽에 카카오톡으로 다급한 문자를 보내왔던 날도 대상포진의 통증으로 밤새 잠을 설치다 새벽녘 겨우 잠들었을 때였다.


문자로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떨리는 마음으로 B에게 전화를 걸었다.

B에게서 전해 들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A가 늦은 밤 어두운 시골 국도변을 운전해 가다가 교통사고를 냈는데, 피해자가 사망했고 A는 뺑소니범으로 체포되었다는 것. 그런데 A가 잡혀간 지 3일 만인 전날 밤, 그의 아내가 유서를 남긴 채 자살을 하고 말았다...


어찌 이런 일이 현실에서, 그것도 내가 담임했던 제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 이야기라고 해도 너무 지나친 설정이라 할만한 얘기였다.


제자는 어두운 밤길에서 사람을 친 줄 모르고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지만, 피해자 유족은 제자의 주장, 사죄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고 제자는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B는 A의 아내까지 그렇게 되자, 자신의 생업을 접다시피 하고 친구를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난다는 B를 보니, A 옆에 그래도 B 같은 친구가 있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제자를 위해 탄원서를 쓰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B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는데, A를 위한 탄원서를 부탁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도 재판에 도움이 될까 해서 탄원서를 모으는 중이라면서.

이번 사고로 돌아가신 분이 사고 현장 근처의 마을에 살던 어르신이라고 들었다. 이번 사고와 너무나 닮은꼴인 27년 전 나의 아버지 교통사고,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 겹쳐지면서 탄원서를 쓰기까지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다.

'만약 뺑소니 교통사고를 내어 내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이 나의 제자라면, 나는 제자를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슬픔과 분노에 빠져있을 피해자의 유족들이 27년 전 우리 가족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니 제자의 편에서만 생각할 수 없었고, 탄원서 쓰는 일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써야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제자를 가르쳤던 교사로서 나 또한 책임을 통감하며 용서를 구해야 했다. 제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져야겠지만, 엄마까지 잃은 그의 어린 두 자녀를 위해 유족과 재판부의 선처를 호소했다.



나의 은사님처럼, 나도 '징검다리' 되어주고파


나에게도 존경하는, 그래서 지금까지 안부를 주고받는 고등학교 은사님이 다.


오래전 초임 교사 시절, '스승의 날'을 맞아 찾아뵙지는 못하고 은사님께 메일을 보냈다. 나의 교직 생활 얘기를 적은 후, 의례 하는 말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자주 연락드리지 못하는 죄송함'을 진심을 담아 표현했었다. 내 편지에 선생님이 답신을 주셨는데, 다음은 내가 교직생활을 하며 두고두고 잊지 않기 위해 마음 깊이 새긴 은사님의 말씀이다.


" '학생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가 항상 어려운 화두인데... 우리들(교사) 자신이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물을 건네주고 그냥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가게 하는 존재. 저들이 세상을 향해 나갈 때 돌아보며 징검다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쓸쓸해하지 않기. 알아주는 사람이 적다고 해도 그 길을 감당해야 함을 생각하면서, 다만 힘들어하는 아이들 마음을 조금은 더 다독거려줄 줄 알아야 함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나의 은사님이 그러신 것처럼, 나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 또한 졸업한 제자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결코 섭섭하지 않았다. 넓은 세상으로 나간 제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오늘 스스로에게 다시 묻고 있다.

학생들에게 교사는 어떤 존재이어야 하느냐고...


그러다 나도 무척 오래간만에, 그동안 아이들과 만든 학급문집들을 꺼내어 다시 읽어보았다. 학급문집 앞부분에 항상 '문집을 펴내며'란 나의 글을 싣는데, 이 부분을 읽다가 내가 울고 말았다. 내가 쓴 글을 보고 내가 울다니... 이 말은 아이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네.

'과거의 내''현재의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가르친 너희들은 ‘선생님의 미래’야. 나의 미래인 너희들이 언젠가 우리가 함께 했던 ‘고교 시절’을 천천히 뒤돌아볼 때가 있을 거야. 그때가 언제일까? 우리가 함께 부르던 노래 제목처럼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커서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쯤? 아니면 지금 선생님만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누구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잃어버린 시간을 그리워할 때가 있단다. 그럴 때면 책장 한 모퉁이에 꽂혀 있을 우리의 문집을 한 번 펼쳐보렴. 학급문집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얼마나 크게 웃고 서로 어울려 행복했었는지 보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서로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했음을 알게 되겠지....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젊은 날 소중했던 꿈들, 작은 행복을 잃어갈지도 모른단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이라도 우리의 학급문집을 보다가, 원래의 순수했던 자기 자신과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문집을 펴내는 선생님의 ‘소망’이란다.
학년 말에 아이들과 함께 만들었던 학급 문집들


P.S. 지금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견디고 있을 나의 제자 A가,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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