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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Nov 18. 2020

이 결혼 엎자!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던 시아버님

이 결혼 엎자!!



시아버님이 말씀하셨다. 내게 직접은 아니고 당신의 아들에게.


며칠 전 결혼 24주년 기념일을 맞아, 남편과 외식을 하던 자리에서 지나간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다 소환된 기억이다.


당시 아버님이 심각하게 하신 말씀이라 조심스럽게 전달하면서도 나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 곤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던 남편의 얼굴 표정이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말이야, 그때 아버님, 정말 너무 하셨던 거 아냐?"

새삼스럽게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억양은 조금 높아졌다.  


"그랬었나? 당신이 얘기하니까 그랬던 것도 같고..(멋쩍게 웃음)"

잊을 일이 따로 있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어떻게 그때 일을 남일 얘기하듯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남편의 기억이 희미해졌다는 사실이 더 어이가 없었다.


옛 대학 동창(남편)을 만나 나의 '결혼 못할 뻔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듯,  '시아버님과의 삼세판 진검승부' 라 이름 붙인, 그때의 '사건들'을 결혼기념일에 남편과 (웃으며) 다시 회상하게 되었다.



24년 전 여름, 양가 상견례가 끝나자 곧 결혼식 날을 잡았다. 보통 결혼식 날은 신부 측에서 잡는다고들 하던데, 시부모님이 정했다. 그건 어째도 좋았고, 결혼식까지는 3개월 남짓 남아 있었다.


# 1. 전초전

교사로 발령받던 해, 친구의 소개로 한 이벤트 업체에 회원가입을 했다. 다양한 레저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고,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 준비 과정에서 다양한 혜택이 있었다.


나는 애초 예식장에서의 결혼식을 원치 않았다. 시장처럼 정신없고 획일적인 풍경이 결혼식 공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이벤트 업체와 함께 의논해보자고 얘기했더니 돌아온 대답,

".... 저... 아버지가 벌써 예식장 정하고 예약까지 하셨어.."

"신부 측에는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시아버님은 우리 쪽의 편의를 위해 특별히 친정집 근처의 예식장을 예약하셨다고 했다. 남편을 통해 아버님의 뜻을 돌려보려 했지만 남편은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한 듯했다.

친정엄마도 친척들이 찾아오시기에는 일반 예식장이 더 낫다며 시댁 쪽 손을 드셨다.

친지들 앞에서 혼인서약을 하는 결혼 예식만큼은, 양가 부모님 뜻에 따르는 것이 키워주신 부모님에 대한 자식 된 도리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예식장 문제는 내가 깨끗하게 승복했다.


#2.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에게 '신혼여행지 선택'은 행복한 고민 중 하나일 것이다.

80년대까지 제주도가 대세였다면, 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바람을 타고 90년대부터는 해외 신혼여행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이미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해외여행에 적극적이었지만, 남편은 해외는커녕 서울도 입사시험 면접 보러 간 게 처음이었다니 더 말해 무엇하리.

그런 남편의 첫 해외여행으로 신혼여행 장소를 신중히 물색하고 있었다.


3박 4일로 가서 휴양하고 오기 적합한 세 군데 후보지를 뽑아 남편이 원하는 곳으로 최종 결정을 하려고 퇴근 후 만났는데...

어디가 좋냐는 나의 물음에 한참 동안 말을 못 하는 게 수상쩍고 불길했다.


'또 뭐지?' 하면서도 설마 남편의 입에서 다음 말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버지가 우리 신혼여행도 이미 예약하셨대"

"응?? 우리가 어디 가는 줄 어떻게 아시고?? 아직 우리 어디갈지 결정도 안 했잖아..!!"

".... 제주도... 2박.. 3일..."

겨우 '제'란 말을 꺼내고 '주도'는 입만 뻐끔거리듯 흐려지더니 '2박 3일'은 듣지도 못했다.


남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농담'할 줄 모르고 '쓸데없이 진지한 스타일'이다. 그런 걸로 장난칠 사람이 못되니 '팩트'라는 얘긴데, 황당하여 믿을 수가 없었다.


결혼 식장은 양가 부모님, 친척, 하객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인 만큼 혼주인 부모님 뜻대로 정한다 해도 따를 수 있었다.


그러나 신혼여행은 시부모님과 같이 가는 게 아닌데, 우리 부부 둘이 가는 여행을 왜 우리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 맘대로 결정하시지??


남편이 중간에서 '조정의 역할'을 해줄 거란 기대는 '예식장'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미 접었더랬다. 남편은 단 한 번도 부모님께 '아니오'란 말을 해본 적이 없는 듯했다.


'내가 직접 아버님과 담판을 지으리라'

나 또한 시아버님 되실 분과 결혼 전부터 대립각을 세우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뭇 비장한 마음으로 시아버님과 마주 앉았는데, 내가 말을 꺼내기 전부터 방안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옆에 있던 시어머니와 남편이 더 긴장한 듯 표정은 굳었고 낯빛은 어두웠다.

그런 분위기가 내겐 참으로 생경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을 못한 것'이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의 공기를 깨듯 내가 말을 꺼냈다.

내 직업이 학생들 앞에서 말하는 교사요, 어릴 때부터 어른들 앞에서든 무대 위에서든 거침없이 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신혼여행지 결정권의 이양' 즉,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합당한 이유도 조목조목 상냥한 어투로 덧붙였다.


말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게 부탁을 드려야 할 일인가?'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왔지만, 해맑은 얼굴로 아버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하고픈 말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예의 바르면서도 논리 정연하게 잘 말씀드렸다고 자평하며 내심 뿌듯하기까지 했는데, 내 말이 끝나고도 아버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목으로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한 침묵이 5분 이상 흘렀던 것 같다. 한 마디 추임새도 없이 내 말을 듣기만 하셨던 아버님이 드디어 입을 여셨다.

"자식은 부모의 말을 따라야 하는 법이다. 며느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신혼여행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지만...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내가 예상치 못한 아버님의 답변이라 순간 당황했다.

'허락인 듯 허락 아닌, 허락 같은' 말씀에 나는 전혀 고맙지 않은데도

"고맙습니다"라고 영혼 없는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아버님 말씀이 귓가에 무한 반복되는 듯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시 R&B 그룹, '솔리드(Solid)'의 3집 앨범 타이틀곡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란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 노래가 곳곳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아버님의 말씀이 악몽처럼 자동 재생되었고,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곡'이 되었다.


#3. "이 결혼 엎자"

결혼식장, 신혼여행 문제로 결혼을 준비하는 마음이 한층 조심스럽던 차에 더 큰 문제가 터졌다.

'전셋집'

그 이전까지 나와 시아버님이 대립해도 친정엄마는 가능한 시댁 뜻에 따르자는 입장이었지만, 집 문제에서는 엄마가 먼저 시아버님 결정에 반기를 들고 나오면서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시아버님은 어떤 계획을 세우시면 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파'시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근면 성실하게 직진형 인생을 살아오신 분.


결혼해서 살 신혼집을 마련하는 것이 사실 결혼에서 가장 큰 문제인 만큼, 시부모님께서 신경 쓰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 그래서 두 분이 바쁜 아들, 며느리를 위해 직접 집을 보러 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까지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 어디 아파트, 어느 집이 괜찮은 것 같더라. 몇 군데 봐 두었으니 너희들이 한 번 가서 보거라' 하셨더라면...


그런데 이번에도 우리 아버님은 당신의 판단을 의심치 않으셨고, 집을 보신 당일 바로 가계약(假契約) 금까지 걸어 놓으셨다.


잠깐, 이 부분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하여 미리 밝혀 둔다. 신혼집은 남편 직장에서 무이자 대출 지원이 가능하여 시댁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결혼 후 우리가 벌어서 갚았다(애초에 부모님 도움받을 생각도 안 했지만, 시부모님이 전세자금을 지원하며 집을 구해주신 거였다면 가타부타 아무 말도 못 했을 거다).


친정엄마는 아파트가 외진 곳에 있어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 남편이 지하철까지 너무 멀고, 아파트 가까이에 변변한 마트가 없어 생활에 불편함이 많은 점 등을 들어 마땅찮아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길에서 아파트까지 길이 좋지 못하여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딸의 밤길 운전이 걱정되시는 듯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지 채 3년이 되지 않은 때였으니...


나는 미리 사놓은 12자 장롱이 큰방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했다.(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집도 구하기 전에 가구부터 샀는지 모르겠다ㅠ)


아버님이 계약한 아파트를 나와 엄마가 내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전해 들으신 아버님은 크게 노하셨고, 급기야 엄청난 말씀을 하시기에 이르렀다.

"이 결혼 엎자!"


아버님의 그 말씀을 직접 들었을 남편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던 시어머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철렁 내려앉았을지 이제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버님은 화를 삭이시느라 애꿎은 소주잔만 밤새 기울이셨으리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萬古의 眞理)'인 것일까?


아버님은 차마 자식의 결혼을 '엎'지 못하셨고, 우리는 지하철역과 대형마트가 가까운, 아파트는 좁아도 12자 장롱이 들어가는 집을 전세로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시아버님이 격노하셨다는 것은 알았지만,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는 말씀까지 하신 줄은 당시에 몰랐다.

우리가 원하던 아파트로 다시 계약을 하고 난 뒤에야 남편은 이야기를 했다.

'아버님의 상심이 크셨지만, 우리를 위해 을 접어주셨음을, 아버님의 그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 남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신혼여행 문제로 내가 찾아갔을 때 아버님은 나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 분명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고) 너희 뜻대로 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못 박으신 바 있다.


얼마나 결의에 찬 듯 단호하게 말씀하셨던지, 그 말은 한동안 내 귓가를 떠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당신이 하신 말을 한 달도 안되어 스스로 휴지조각 만드신 결과가 되었으니...


그 날 집에 돌아와서도 남편에게 들은 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신혼여행이나 신혼집 문제에서 결국 아버님의 뜻을 꺾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지만, '쟁취했다는 승리의 기쁨'보다 '답답하고 불편한 마음'이 더 앞섰다.


'얼마나 속이 상하셨으면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하셨을까..'


갈등을 빚던 시기에서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아버님의 말씀이 섭섭하거나 황당하기보다 아프게 와 닿았다.


결혼도 하기도 전에 미운털이 박힌 '당돌한 며느리'로 낙인찍히기는 싫었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시아버님이라도 나는 지혜롭게 잘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었는데...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나였기에 시아버님께 사랑받고 인정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관계가 틀어지고 꼬여버렸다. 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전지적 시아버님 시점'으로 지나간 '문제의 사건들'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결혼식장, 신혼여행, 전셋집 문제까지 아버님이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시는 바람에 갈등을 빚게 되었지만, 그 판단의 기준은 '아버님의 편리'가 아닌, 철저하게 '며느리와 자식의 입장'이 우선이었다.


결혼식장이나 신혼집을 친정이 있는 동네로 정하신 것만 봐도 그렇다.

남편도 하나 아들이지만, 딸을 결혼시키고 혼자 지낼 친정엄마와 그런 엄마를 걱정할 며느리를 먼저 배려하신 아버님의 뜻이었다.


딸, 아들을 흔히 차별하여 키우던 시절, 집안에서 딸을 대학 보내 뭐하냐고 다 말리는데도 시아버님은 손위 시누 셋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모두 전문직 여성으로 키워내셨다.


하나 아들이라고 마음속으로 특별히 아끼셨는지는 몰라도, 키우면서 딸과 아들에게 결코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런 시아버님이셨으니 우리의 제주도 2박 3일 신혼여행은 어쩜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세 딸이 모두 제주도 2박 3일 신혼여행을 다녀왔고, 아들이라고 특별 혜택은 없으므로.


아버님의 판단과 결정은 당신 자신보다 가족과 자식이 항상 우선이었으므로 그것이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 믿으셨으리라.

아버님의 두 어깨에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앞서 나가며, 온갖 역경에 홀로 맞서 헤쳐나가는 것이 '아버님 방식의 가족사랑'이었던 것이다.


다만, '일방통행'이었다.


전쟁에서 사령관이 냉철하게 판단하여 명령을 내리면 그에 따라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시절 아버님 세대는 전쟁 같은 가난과 싸우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어떻게 '소통'하는 것인지 모르고 사셨다.

가족은 항상 당신 자신보다 우선이었고, 온 힘을 다해 가족을 사랑했지만 '소통하는 법'을 모르셨으니 항상 외로우셨다.


자식도 아버님의 속 깊은 사랑을 알고 존경했으나 권위적인 아버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했을 뿐,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가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시아버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다. 진심을 전달하기엔 말보다 글이 나았다. 생각의 차이와 오해들로 관계가 틀어진 시아버님과 나의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나의 성장과정부터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이후 달라진 나의 인생관과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 그리고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시부모님과 며느리의 관계에 대하여...

결혼 준비 과정에서 빚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안타까움 등을 솔직하게 적어 내려갔다.


오래전 일이지만, 진심을 다해 적었고 그 자체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었으므로 편지를 며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진심은 통했다.

우편으로 나의 편지를 받아보신 아버님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지셨다고, 물론 겉으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편지를 읽고 매우 흡족해하셨음을 얼굴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고 당시 남편이 전해주었다.



결혼 이후 권위적인 아버님의 며느리로 살면서 힘든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결혼 전처럼 대립각을 세우며 맞섰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삶의 방식'이나 '생각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으나,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으므로 아버님도 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결혼 전의 '삼세판'이 훌륭한 '예방접종'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진심을 다해 쓴 '눈물의 편지'는 아버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아버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내편'이 되어 주셨다.


당신의 자식들에겐 무척 엄격한 아버지셨지만 시아버지로서 며느리에겐 조금 특별하게 너그러우셨고, 우리 두 딸들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을 인자하고 사랑 넘치는 할아버지셨다.


나의 시아버님으로 14년을 사셨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아버님을 보내드렸다.

지상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던 날, 내가 아버님께 할 수 있었던 말은 딱 한 마디뿐이었다.

그 말만 하고 또 하고...

아무리 해도 해도 부족했다.


"아버님, 고마웠습니다... 고맙습니다..."


24년을 함께 걸어온 우리 부부, 산책하는 뒷모습을 둘째딸이 담았다.(올해 가을, 구례 섬진강 대나무숲 길에서)
아버님~
앞으로도 아범 손잡고 잘 걸어가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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