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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Nov 01. 2020

베트남에서 생긴 일 1. 머피의 법칙

맛있는 '러우(lẩu)' 한 번 먹으려다가...

일이 자꾸 어긋나고 꼬인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베트남 하노이의 중화 지역에서도 중심지.


세 사람이 신호등 없는 8차선 횡단보도를 건넌다(베트남에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많다). 달려오던 차들은 보행자가 길을 건널 수 있도록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세 사람은 느려지는 차 속도를 느끼며 그에 맞춰 발걸음을 재촉했다. 손을 잡고 양산을 같이 쓴 두 사람이 앞 서 건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중화(Trung Hoa): 하노이에서 한인타운이 처음 형성되었던 곳. 지금은 한인 거주 중심지가 미딩(My Dinh)으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한국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한인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다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난 뒤 찬찬히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던가...?' 하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그때는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시해버린 어떤 '상황이나 조짐' 같은 거 말이다.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그날도 그랬다.
아침부터 이상하게 일이 꼬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는 곳, 하는 것마다 '사사건건' 모든 일들이 어긋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강력한 힘이 나를 저지하며 '그냥 가만있으라' 하는 것처럼...


'베트남어 스터디 그룹, 3인방'의 결성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첫 해(2016년), 몇 달간의 적응 기간이 지나고 베트남어 공부를 시작했다.

초급과정을 마치고 중급과정을 공부하면서 지연, 지영 씨를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모두 이웃에 살고 있어 자주 만나 금세 친하게 되었고,  자격증 시험을 목표로 스터디 그룹까지 만들어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지영 씨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 당시 베트남 생활 2년 차로, 그해 베트남에 왔던 지연 씨나 나보다 선배여서 베트남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실,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나 베트남에서 직업을 가지려는 사람이 아닌 이상, 대학 어학원 과정에서 중급과정까지 공부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하노이 한인 타운에서는 '여기가 베트남 맞아?' 싶을 정도로 한인 중심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베트남어를 몰라도 생활하는데 거의 불편함이 없었다. 택시 탔을 때 필요한 생존 베트남어 정도만 익히면 되었다. 설령 배운다 하더라도 6 성조와 발음이 어렵다 보니 2~3달 초급 과정에서 끝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편의 파견 근무로 베트남에 와서 3년, 길어야 4년 정도 있다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우리들이었고, 베트남에서 취업을 할 것도 아니면서 베트남어 중급 자격증 취득을 위해 어학원에 등록하고 그룹 스터디까지 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베트남어 공부 자체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세 명은 잘 통했다. 공부를 하면서 현지인들과 의사소통이 조금씩 가능해지고, 그런 만큼 베트남 생활에 활력이 더해짐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이별과 3년 만의 재회             

지영 씨는 공부 시작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남편의 갑작스러운 한국 귀임 발령으로 정들자 이별을 해야 했는데, 그렇게 먼저 떠난 지영 씨가 올해 1월, 3년 만에 하노이를 다시 찾아왔다.

우리에게 닥칠 엄청난 사건은 물론, 코로나 19가 가져올 전 세계의 팬더믹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하던, 뭔가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던 2020년 새해였다...    

          

한인 타운이 있는 '미딩' 지역과 가까운 곳의 한 호텔을 예약했다는 지영 씨를 겨우 설득하여 예약을 취소하고 우리 집에 머물도록 했다. 지영 씨 혼자 오는 여행이었고, 우리 집에는 항상 비어 있는 방이 있었으며, 당시 남편은 하이퐁(하노이에서 120km 정도 떨어진 도시)에서 일했기에 주중엔 집에 없었다. 우리 집에서 지내며 밤늦게까지 편하게 실컷 얘기하자는 나의 제안이, 민폐가 될까 염려하던 지영 씨의 마음을 접게 만드는데 유효하게 먹혔다.          

          

하노이 미딩 지역에 살 때, 집에서 찍은 아침 출근시간 거리 풍경


앞 사진을 부분 확대한 것. 출근시간이면 도로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마구 뒤엉켜 혼잡을 이룬다.

.

 지영 씨가 하노이에 도착한 이틀째 되던 날, 지연 씨도 함께 '베트남어 스터디 그룹 3인방'이 다시 뭉치기로 했다. 오랜만에 하노이를 찾은 지영 씨를 위해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지연 씨와 나는 호떠이(서호. 베트남어로 '서쪽 호수'라는 뜻)에 있는 전망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주변 카페에서 얘기를 나눈 뒤, 호안끼엠(베트남어로 '검(劒)을 먹은 호수'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하노이의 대표 관광지) 주변도 돌아보기로 했다.     


평소 아침에 아이가 학교를 가면 나는 곧바로 운동을 하러 가곤 했다. 하지만 그 날은 지영 씨가 우리 집에 와 있고, 또 지연 씨와 다 같이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어서 아침 운동을 쉬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전날 지영 씨가 자신은 피곤해서 조금 늦게 일어날 테니 나더러 신경 쓰지 말고 운동 다녀오라고 당부했던 터라, 어쩌나..  망설이다가 빨리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하노이의 겨울은 한 달 내내 쨍한 햇빛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흐리고 습한 날이 대부분이다. 건조한 우리나라의 겨울과 달리 습도가 매우 높아서 제습기 두 대를 돌려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느 겨울 아침 창밖 풍경. 하노이의 겨울은 안개와 미세먼지가 뒤섞여 대기오염이 심한 편이다.

# 머피의 법칙 상황 1

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나와보니 안개가 너무 심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비도 내리고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그냥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살짝 고민했지만 집에서 이미 그랩 택시를 부르고 나왔던 터라 그냥 택시를 기다려 탔다. 그날따라 웬일인지 도로가 꽉 막혀 택시는 30분이 지나도록 한 블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 운동하러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니면 택시를 취소하고 집으로 바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걸 마음속으로 후회하며 속만 태웠다. 비만 오지 않았다면, 우산만 갖고 있었더라면 택시에 갇혀 1시간 넘게 있지는 않았으리라. 택시에 앉아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알아보니, 그 날 아침부터 도로공사 관계로 내가 지나가야 하는 도로가 전면 통제되고 있었다. 사전에 제대로 통보가 되지 않아 차들과 오토바이가 마구 뒤엉켜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베트남 택시 기사에게 그 사실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자신도 들은 바가 없다며 마구 불만 섞인 말을 쏟아냈다.


베트남에 살다 보면 이런 식으로 어이없는 일들을 자주 당했던 터라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결국 운동도 못하고, 도로 위 택시 안에 갇혀 발만 동동거리다 1시간이 넘게 걸려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침부터 힘이 쫙 빠져버린 듯했다.     

          

집에 돌아와 지영 씨에게 내가 겪은 황당 스토리를 늘어놓으며, 그날의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호떠이를 가봤자 전망이랄 것이 전혀 없을 건 뻔한 일이었다. 비도 오고 쌀쌀하니 가까운 곳에서 따뜻한 베트남식 샤브요리, 러우(lẩu)를 먹기로 했다.     

러우(lẩu): 핫팟(Hot pot), 훠궈(火鍋, hǔogūo), 샤부샤부(しゃぶしゃぶ)라고도 부르는데, 냄비에 육수를 끓이고 채소와 고기를 담가 익혀 먹는 방식의 음식으로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그 일주일 전 연말에 가족과 함께 갔던 호텔 레스토랑의 '러우'가 맛있었던 기억이 나서 지연 씨와 그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변경했다.      

다양한 재료로 만드는 베트남식 샤브샤브, '러우(lẩu)'              사진 출처: nairrti.wordpress.com

# 머피의 법칙 상황 2

호텔 로비에서 지연 씨까지 3년 만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요란한 인사로 반가움을 나누며 들떴던 마음도 잠시, 우리는 곧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우리가 먹으러 갔던 '해산물 버섯 러우'는 연말 이벤트로 진행한 한시적 메뉴로,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다른 메뉴를 살펴봤지만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 없었다. 평소 때였다면 그냥 대충 다른 메뉴를 선택해서 먹었겠지만, 그 날은 지영 씨가 3년 만에 하노이를 찾아와 3인방이 다시 모인 '특별한 날'이었던 것이다. 대충 '아무런 음식'으로 때울 수는 없었다.


이번엔 지연 씨가 자신이 아는 러우 맛집이 있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을 했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우리는 얘기하며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안개도 조금씩 걷히면서 구름을 뚫고 밝은 햇살까지 비추려 하고 있었다.      


'그냥 호떠이로 갈 걸 그랬나?'     

아침부터 일정이 꼬여 장소를 변경했는데, 그 식당마저 불발되자 지영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영 씨, 지금이라도 택시 타고 호떠이로 갈까? 날씨도 괜찮아지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근처에서 놀고 호떠이는 다른 날 가면 되죠"     

우리 마음이 불편할까 봐 지영 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하노이의 거리를 걸어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즐거워하는 지영 씨를 보니, 다시 마음이 가벼워져서 식당까지 수다를 떨며 즐겁게 걸었다. 밥도 먹기 전에 미리 많이 걸었으니, 점심이 엄청 맛있겠다는 말로 애써 위안 삼으면서...


# 머피의 법칙 상황 3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식당은 재개장을 위한 리모델링 중으로 아예 영업을 하지 않았다. 미리 전화를 해보지 않고 무작정 걸어온 것을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지?"     

대략 난감해진 내가 허탈한 마음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가 다시 만난 오늘을 절대 잊지 말라고 그런가 봐요~ 호호호"     

막내 지연 씨가 애써 밝게 웃으며 큰길 건너 새로 생긴 쇼핑센터에 음식점이 많다며 그쪽 '러우 전문점'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 머피의 법칙 상황 4

다른 뾰족한 선택지가 없었던 우리는 또 걸어서 큰길을 건넜다. 베트남에서는 가까운 거리도 택시를 타는 경우가 많지만, 어쩌다 보니 우린 계속 걷고 있었다. 새로 지은 쇼핑센터라 그런지 건물에 들어서자 각종 휘발성 화학물질로 눈과 코가 매웠다. 그런 곳에 맛있는 식당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역시나 식당에 앉아서 종업원의 추천까지 받아 가장 맛있다는 '러우'를 시켰지만, '시장이 반찬이다'란 말도 무색하게 특징 없는 그저 그런 맛이었다. 한국의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맛보는 베트남 음식 같은 맛이랄까.  애초 기본 양만 시킨 것은 귀중 잘한 일이라며, 우리는 그 음식으로 배를 다 채우지 않기로 했다.  

맛있는 점심을 먹지 않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사람들처럼, 기필코 맛있는 '러우'를 먹어야 할 역사적 사명과 책임이라도 가진 사람들처럼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우리가 결국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중화(Trung Hoa)에 있는 '꽌안응온(Quan an ngon)'으로, 하노이에 온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대표 음식점이었다. 현지에 사는 교민들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그 식당을 보통 기피했다. 중국 관광객들이 많아 너무 시끄럽고 '맛도 그저 그런'이란 평가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있던 곳에서 가까웠고, 또 최근에는 '음식 맛이 꽤 괜찮아졌다더라'라는 '카더라 통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만나 식당을 찾아 헤맨 지 두 시간이 넘어서야 우리는 '꽌안응온'에서 제대로 만족하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애초 호떠이에서 점심 먹기로 한 계획에서 무려 네 번이나 식당을 바꾸었다. 맛있는 '러우' 한 번 먹으려고 한 것이 그토록 힘들 줄 몰랐다며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라고 입을 모았다. 


일이 여러 번 꼬이는 바람에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지영 씨가 오래 그리워했던 맛있는 베트남 음식을 먹게 했다는 점에서 지연 씨나 나는 큰 일을 해낸 것처럼 흐뭇하고 뿌듯했다. 끝이 좋아서 다행이라며 비로소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당시 '양준일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가수에 열광하고 있었는데, 그런 쪽과는 거리가 먼 나나 지영 씨와는 달리, 지연 씨는 팬클럽에 가입할 정도로 그 가수의 매력에 푹 빠져 있던 상태라 한 번 시작한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런 지연 씨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다는 듯 우리는 듣고 있다가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듯하여 더 편하게 대화 나눌 수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맛있는 점심 먹기 미션'을 무사히 마친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카페로 가기 위해 8차선 대로를 건너야 했다.   

             

하노이의 날씨는 하루 중에도 변화무쌍하다.

아침에는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고 비에 바람까지 불어 을씨년스럽던 날씨였는데, 어느새 양산을 써야 할 정도로 쨍하니 변해 있었다. 아무튼 햇빛을 보기 힘든 하노이의 겨울에 햇살이 밝게 비추고 있으니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양산을 받쳐 들고 왼손으로는 지영 씨의 오른손을 잡아 이끌듯 하며 조심스레 길을 건넜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 날은 우리의 말처럼  정말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고 말았다..



일이 자꾸 어긋하고 꼬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일단 멈춰야 한다.

찬찬히 다시 되짚어보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머피의 법칙(영어: Murphy's law): 어떤 일이 잘못되어 가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양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즉, 하려는 일이 항상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머피의 법칙에 따르면,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둘 이상의 방법이 있고 그것들 중 하나가 나쁜 결과(disaster)를 불러온다면 누군가가 꼭 그 방법을 사용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꼬여가는 것이다.” 1949년 미국 공군에서, 인간이 중력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할 때 대위로 있었던 에드워드 머피(Edward A. Murphy)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베트남에서 생긴 일 2>에서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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