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늘 종이에 해야 할 일을 적었다. 명절, 김장, 여행, 청소 등 모든 일에 앞서 할 일을 적어 냉장고에 붙여두곤 했다. 그리고 그 습관을 내게도 전해 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라'는 잔소리는 물론이고 플래너 적는 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줬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다. 책가방 챙기기 귀찮아서 모든 책을 들쳐메고 다니던 애가 메모 하는 습관이 쉽게 생길리 없었다.
메모하는 습관은 중학생이 되면서 생기는 듯 하다가 고등학교를 다니며 사라졌다. 외국어 고등학교 입학을 목표로 매일 공부하던 중학생 시절에는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었다. 쪽지시험, 수행평가를 비롯한 전반적인 학교 생활부터 학원 숙제까지 해야 할 일이 쏟아졌다. 그제서야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고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첩에 매일 할 일을 적어 스터디플래너의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할 일을 하나씩 해치우고 줄을 좍좍 그을 때의 희열감 때문에 메모에 열을 올렸던 것 같다.
그러나 외고 입시에 실패하고 격동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메모하는 습관도 저 멀리 날아갔다. 당시에는 인터넷강의 사이트에서 나눠주는 스터디플래너가 유행이어서 친구에게 얻었던 기억은 나지만 잘 사용한 기억은 없다. 학기 초에는 하루 하루 계획을 적기도 하고 목표 하는 학교도 적어보며 나름 알차게 사용하나 싶었지만 이내 그만뒀다. 정확히 말하면 더이상 줄을 긋는 희열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공부 잘 하는 학생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보내다 외고 입시에 실패했고, 근방에서 공부 잘 한다는 학교에 마지못해 진학해선 중위권 성적에 만족해야만 했다. 모의고사에서는 1등급이 나와도 내신에서는 대부분의 과목이 4등급이었고, 이 말은 곧 대학 입시와 연결되었다. 이미 외고 입시에서 쓴 맛을 본 나는 대입 역시 힘들 수 있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점점 더 공부가 재미 없어졌다. 공부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얌전한 모범생이었지만 속은 공허 그 자체였다. 더욱이 당시엔 집에서도 공부할 환경이 여의치 않았다. 매일 돈문제로 싸우는 부모님은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물론 이런 환경을 극복하고 공부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지만 나는 나약했다. 스터이플래너에 잔뜩 써 놓은 '오늘의 공부할 것'은 점점 늘어났지만, 줄을 그을 수 없었다. 결국 나중에는 스터디플래너조차 들고다니기 무겁다고 그냥 두고 다녔다. 이렇게 내 메모 습관은 고등학교 3년동안 완전히 박살났다.
이런 내가 다시 손에 연필을 쥐고 종이에 메모를 시작한 것은 뜨개질을 하면서 부터였다. 뜨개질하면 메모하는 습관을 필히 가져야 한다. 내가 어느 단까지 떴는지 확인하고, 어느 곳을 기준점 삼았는지 확인해야 하고, 내가 무슨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뜨개질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오늘 뜨고 내일은 뜨지 못할 수도 있다. 손에 바늘을 쥐쥐 못하는 날이 하루가 이틀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기도 한다. 이 시간 동안 뜨개질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더군다나 내가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의 뜨개질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한 무늬를 넣은 대바늘 목도리나 모티브를 연결해 만드는 블랭킷 같은 경우에는 사실 메모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뜨개 레벨이 올라가며 더 다양한 것을 뜨려면 메모가 필수인 순간이 온다. 내게 그 첫 순간은 인형이었다. 처음으로 손뜨개 인형을 만들어보고자 솜까지 다 구매 한 뒤 도안을 보니 '38단 까지 [V I] 를 반복하시오, 38단의 코 수는 126개가 되어야 합니다'와 같은 표현이 가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는 무조건 편물에 시작코를 표시해야 하고, 도안에는 내가 지금 몇 번 째 단을 뜨고 있는지도 틈틈히 메모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단수링 같은 방법을 사용해도 되지만, 이 방법은 내게는 맞지 않았다. 5단마다 편물에 단수링을 꽂아야 하는데, 숫자에 약해 고작 5단을 세는 것도 어려워 여러번 세거나 제대로 못 세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연필 손에 들고 종이에 쓰는 방법'을 택했다.
뜨개질을 하며 메모를 시작하자 몸이 메모하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인지 메모하는 일이 다시 습관처럼 몸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집에 굴러다니던 수첩에 하루 하루 할 일을 적기 시작했고, 구매해야 하는 물건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노트북에 붙여 두었다. 연구를 하면서 문뜩 문뜩 생기는 궁금증도 포스트잇에 적어 노트북에 붙인다. 노트북이 노란 포스트잇으로 가득 찬다.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쾌감을 다시 한 번 느껴본다.
메모를 한다는 것은 내겐 하루를 살아낸다는 뜻이다. 손으로 연필 꽉 쥐고 글씨를 써 내려가며 흘러가는 시간 속 내 모습을 채워 나간다. 누군가에게 내보일 만큼 멋진 글씨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다이어리 꾸미기와도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이 메모들은 내겐 그 무엇에 비할 바 없는 멋진 삶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