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유별하거늘-
서로 다르지만 틀린건 아닙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능력있고 멋있는 언니들을 잔뜩 만나게 되었다. 자신의 커리어는 물론이거니와 가정 역시 살뜰이 살피며 학업까지 이어나가는 모습에 자극도 많이 받고 열정도 본받을 수 있었다. 슈퍼 우먼이 따로 있나 언니들이 내 눈에는 슈퍼우먼이었고 히어로였다. 언니들이 많아진 덕분에 이 나이에 막내가 되어 귀여움을 잔뜩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고 행복인 날들이었다.
코로나가 한참이던 어느 날, 화상으로 열리는 학회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내가 제일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고 디지털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절절 메며 노트북을 셋팅하고 헤드셋과 마이크를 점검하던 중, 성희 언니가 누군가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학회의 발표자이자 어느 곳의 교수님이신 그 분은 성희 언니의 대학 후배였다. 언니가 만들어둔 족보를 받아 시험을 보곤 했던 그 후배가 교수님이 되어 언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언니도 대학 졸업 후 오랜 시간 연락 안되었던 후배를 만나 기쁘고 반가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학회가 모두 끝난 다음날 언니는 잔뜩 가라 앉은 얼굴로 나타났다. 똑같이 가정을 이루었고, 자녀가 둘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자신보다 먼저 교수가 된 후배의 모습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며 담담히 말하는 그 모습이 더욱 슬퍼보였다. 가정을 돌보느라 자신의 학업도 중단한 적 있고, 지금도 자신의 공부보단 아이들의 시험공부가 더 우선시 되는 언니의 삶을 알고 있었기에 언니의 비탄과 자조(自嘲)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위로의 말조차 하등 도움안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 입에서는 "언니는 잘 해왔어! 언니도 이제 곧 교수님 될꺼면서 뭘 부러워 해! 난 지금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행복한 가족들도 있고, 언니 삶도 놓치지 않고 있잖아"라는 말만 내뱉어질 뿐이었다.
그 후 한참 뒤, 언니의 후배가 우리 학교에 특강을 오게 되었다. 혹여나 언니가 또 다시 슬픔에 잠길까 미리 언니의 기분이 좋아질 수 있게 생전 부리지 않던 애교도 부려보고, 언니의 자랑스러움도 더 많이 떠벌리기를 며칠, 드디어 특강 날이 되었다. 특강시간이 다가오자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강의 자료를 바리바리 싸 짊어메고 오신 모습에 이 특강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었다. 우리도 그 열정을 이어 받아 한층 더 이글대며 수업을 들었다.
특강이 마무리 되어 갈 즈음, 성희 언니가 교수님이자 자신의 후배에게,
"그럼 특강 끝나고 바로 집에 가는 거니? 애들이 기다리겠다. 얼른 들어가야지"
"누나, 집에 어떻게 가. 나는 연구실 돌아가봐야해. 오늘도 3시간 자고 온거야."
"요새도 연구실에서 사는거야? 교수님이잖아!"
"해야지. 해야지 애들 키울라면 내 자리 지켜야지"
나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수업 내용을 새 하얗게 잊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가정을 등한시 해야 한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남녀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저렇게나 능력있는 언니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꿈을 펼치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이제는 남자들이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것의 비탄도 알게 된 것이다.
여자라서 이렇게 해야하고 남자라서 저렇게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라서 못났고 남자라서 잘난 것 역시도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역할을 인식하고 가정에 헌신하는 각자의 위치에 대한 수고를 인정해주는 것이 어떨까 제안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