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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제이 Mar 02. 2020

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지금과는 다른 시대, 잃어버린 나라의 잃어버린 세계에서 태어난 난민 철학자,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적,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 용기 있는 여성 지식인이자 20세기 최고의 정치사상가.


독일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 파리로 또 미국으로 망명해 18년간 무국적자로 살아간 한나 아렌트에 대한 수식어들이다. 그녀는 타인의 입장에 대한 사유, 자신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유가 없는 무능함을 '악의 평범성(진부함) the banality of evil'이라 이름 붙였다.
 
아렌트는 1961년,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참관하며 큰 충격에 빠졌다. 유대인의 체포와 강제이주를 계획·지휘하며 유대인 600만 명의 학살에 가담했던 공무원 아이히만에게서 악마적인 아우라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일 뿐이었다.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그다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봐요.


여기에서 '평범성'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악의 평범성 개념의 핵심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에 있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악의 참모습이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따라서 아렌트는 끊임없이 사유하기를 강조한다. 살아있는 것과 사유하는 것은 결국 같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춰버린 듯한 작금의 우리들에게 아렌트가 전하는 메시지는 꽤나 날카롭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야 하는 이유다.
 
『한나 아렌트의 말』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등의 명저를 남긴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인터뷰집이다. 주요 작품을 출간하고 사상적 체계를 확립한 뒤인 1964년부터 말년인 1973년까지 그의 지성적 행보를 보여줄 네 편의 굵직한 인터뷰가 담겼다.


첫 번째 대담은 아렌트 사상 전반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두 번째 대담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리고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세 번째 대담은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의 학생운동과 흑인 인권운동, 시민 불복종의 문제, 폭력과 권력의 본질 및 관계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네 번째 대담은 아렌트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973년에 가진 생전 마지막 인터뷰다. 이 대화에서 그녀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인의 정체성, 유대교와 기독교 등에 대해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네 편의 인터뷰 내내 아렌트는 정치적 사유와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품게 된 데는 나치에 반대하면서도 적극적인 저항은 하지 않고, 나치의 만행을 사실상 방관한 사람들을 직접 겪은 것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영국 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단테의 신곡을 비유하며 이야기했다.


불의에 대한 방관에 침묵하는 것은
동의를 뜻한다
침묵하는 사람은 모두 공범이다





아렌트의 삶을 만나고 싶다면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도서출판 더숲, 2019)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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