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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엽 May 25. 2020

나의 삶을 결정할 자격을 가진 사람

최근 공격적으로 Corporate Development 조직의 채용을 진행하면서 여러 후보자들의 고민을 듣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기회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커리어와 관련해 내가 내린 결정과 그 결정의 이유,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 등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최선을 다해 나의 의견을 드린 후에 그분들에게 꼭 말씀드리는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첫 번째 풀타임 커리어를 N사에서 시작했다. N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5년쯤 지났을 때 VC로의 이직 기회가 찾아왔다. 2년 이상 준비해왔던 포지션이었기에 쉬운 결정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찾아온 첫 번째 이직 기회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무엇보다 나는 결정 직전에서야 새로운 도전을 위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농협에서 일하느냐는 오해를 받는 시절 입사해서 이제는 전 국민이 매일 접속하는 서비스를 운영하게 된 회사에 대한 자부심, 높은 기준의 역량과 직업윤리를 가진 동료들, 그동안 해왔던 일과 전혀 다른 일을 선택하는 결과로 포기해야 했던 꽤 큰 금액의 연봉(지금도 큰돈이지만 그때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의미였다), 다양하고 세심한 복지혜택, 무엇보다 아들이 잘못된 선택으로 불행해질까 봐 노심초사하던 어머니. 결국 나는 정중히 그 첫 번째 제안을 거절했다.  


그로부터 한 달 동안 매일 출퇴근 길에 내 결정이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초역 5번 출구로 걸어가는 출근길에 머릿속에서 그동안 고민해 왔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더니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심을 하자마자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아주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데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된다고, 나의 결정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너의 결정을 신뢰하며, 그게 어떤 결과로 돌아오든 너를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나와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격려를 해주셨다. 그동안 당신의 아들이 인생의 낙오자가 될까 그토록 걱정하던 어머니의 이 예상치 못한 의연한 반응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가끔 그 극적인 전환의 계기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를 괴롭혔던 것은 당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옳고 그름, 혹은 잠재력과 위험을 가늠할 수 없는 나의 어떤 결정이 아니라, 그 결정을 앞두고 확신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바라보며 느꼈던 불안함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내가 확신을 갖고,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해하는 순간 어머니의 괴로움과 불안함도 사라졌다.  


모든 결정에는 책임이 수반되고 중요한 결정일수록 감당해야 하는 책임도 커진다. 모두의 삶에 커리어는 크고 중요한 부분이기에 가급적 많은 의견을 듣고 싶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전문가나 멘토가 있다면 그가 결정을 대신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경험과 정보와 의견과 염려를 전달해 줄 뿐이다.


내 결정에 대한 누군가의 걱정과 불안함은 결정에 대한 그의 판단이 아니라 그 결정을 마주한 나의 두려움과 불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누군가의 어떤 결정에 대한 주변의 의견과 반응이란 무릇 이와 같다. 내 결정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도, 그 정보에 기반해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도, 결정에 따르는 즐거움과 수고로움과 흥분과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사람도 주변의 전문가나 선배나 친구나 부모님이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이다.


누구도 이 결정을 대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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