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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스타의 거리, Heritage 1881

- 홍콩 영화의 전설을 만나다

나는 다시 구룡반도로 넘어왔다.  스타의 거리로 향했다. 여전히 날씨는 흐리다.



빅토리아만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그 사이로 유람선이 밀려 들어오고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날아다닌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느릿느릿  산보를 한다. 나는 오징어 한 마리를 씹으며  걷는다. 

다리가 아프면 주변 벤치에서 쉰다. 아무 걱정도 아무런 소망도 없이 그저 앉아서 바라본다. 

여행은 오롯이 순간에 집중하게 한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 구룡반도이다. 

이제부터 홍콩영화의 동시 방영이 시작될 것이다. 

그 언제부터였을까. 홍콩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처음 알게 된 것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는 말처럼 홍콩 영화를 보았을 때 홍콩은 내게 존재의 의미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소룡부터 시작된 일일 것이다.

스타의 거리에 있는 유일한 동상, 무도인 이소룡


무술영화의 계보는 그로부터이다. 

무인을 넘어선 도의 경지에 이른 인물. 

워싱턴대 철학과를 중퇴한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삶은 물처럼 살아야 한다"라고 강변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단지 流水 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삶의 상황에서 물처럼 모든 형체를 수용하고 그 형체의 모습에 동화되듯 유연한 삶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의 죽음은 현세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스스로 다른 세상으로 맞짱을 뜨러 간 것은 아닐까?
 그의 사인이 뇌부종이라고 하나 여러 음모론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세인들이 많은 듯하다. 그의 불운은 '크로우'에 출연했던 그의 아들 브랜드 리마저 촬영 사고로 사망했으니 부자의 횡액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다음 배우는 성룡이다. 재키찬. '취권'에서 시작된 그의 영화는 전통 무술에 코믹을 가미한 것이 특징이다.  영화 종료 후 A/S 정신으로 제공하는 NG 장면은 재미에 재미를 더한다. 

스타의 거리에서 가장 많은 손 때 자국이 있다. 아마 대부분 한국인일 것이다.


그와 함께 했던 홍금보, 여명, 매염방 등은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홍콩 르느와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다. 

그 뒤 '왕조현'이라는 여배우는 나의 미적 기준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여자란 저 정도 돼야 제대로 된 여인인 줄 알았다. 174미터에 달하는 우월한 몸매.

그리고 시원시원한 팔과 다리. 서구적이면서 동양적인 듯한 다소 애모 모호한 얼굴.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던 여인.

'천녀유혼'에서 보여준 판타지는 어린 시절 로망 그 자체였다. 

진정 청초에 누운 백골이라도 술 한 잔 권하고 싶은 여인이 바로 그 여인이다. 지금 홍콩 어디쯤 있을까? 

여배우의 운명과도 같은 악성 스캔들. 그리고  사생아의 출산. 옛 것은 사라지고 늙음만 남은 현재의 모습. 

세상에서 사라진 그는 캐나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웅본색'에 이르러 홍콩 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내 청춘의 뒷방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며 닳고 닳은 VTR 리모컨을 돌리며 보았던 영화. 

'주윤발'로 대표되는 그 영화는 홍콩의 영화에서 영화의 홍콩이라는 도시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홍콩을 꿈꾸었다.

바다보다 더 깊고 사막보다 더 광활한 남자들 간의 의리. 배신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라는 설정 속에서 상투적인 선악의 대립이었지만 주체할 수 없었던 총과 칼과 주먹들의 액션.

주윤발이 쌍권총을 난사하며 승리의 성냥개비 물고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시나브로 퇴장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비장미가 넘쳐흘렀다. 그러한 상남자들의 현란한 활극 속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유순한 남자. 

'장국영'이 있다.

2003년 4월 1일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가운데 건물)투신 자살한 장국영


온몸에 피를 흘리며 전화박스 안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마지막 전화를 하던 모습. 

처연한 눈빛은 목석같은 사내들마저 울리게 했다.

슬픔을 살라 먹고 비장하게 흘러나오던 '당년정'의 노랫소리.

영웅본색으로 일약 아시아를 평정한 스타였지만 이미 한국에는 서울 국제 가요제를 통해 두 차례 방문한 이력이 있었다. 나는 그날 밤 그의 마지막 이승의 공간이었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로 갔다.

그가 묵었던 20층 객실은 아직도 아무도 투숙객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호텔 벽면을 따라 걸어보았다. 그리고 까마득히 하늘을 올려보고 그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상상했다. 

아직도 그의 죽음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그가 가고 없는 것은 분명하다.   



스타의 거리는 추억의 영화관이었다. 

나의 영웅들이 핸드 프린팅 된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낯익은 이름과 그의 열 손가락이 나를 향해 인사를 하는 듯하다. 약 400미터를 걷자 스타의 거리 끝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야외 테라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홍콩의 스타를 만나고 온 듯한 흥겨운 분위기 속에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스타벅스 뒤편으로 이어진 고가 계단을 이용하여 다시 페리 선착장 쪽으로 걸어갔다. 

날씨는 점차 더워졌다. 한국에서 입고 온 가죽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도로 주변에 열대성 식물과 꽃이 콘크리이트 담장 사이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간간히 비치는 햇살이 뜨겁다.

아침을 먹지 못한 몸은 빠르게 지쳐갔다. 

정오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아직 가야 할 길과 보아야 할 장소는 너무나 많이 많았다. 

육교에서 다시 인도로, 다시 지하통로로 우왕좌왕 걸으며 다시 인도로 나서는 순간 층층이 쌓아 올린 붉은 벽돌과 다소 완만한 기와지붕을 가진 건물이 나타났다. 지붕은 중국의 문화 전통을, 붉은 벽면은 빅토리아만을 밀고 들어왔던 서양 근대 문명을, 출입구는 동서양 교류의 대문을 상징하듯 투명한 통유리로 출입구를 만든 '상하이 탕 명품 숍'이다. 


붉은 벽돌 곳곳에 한자 '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출입문과 눈 '目'를 형상화한 듯한 창문들이 박혀 있다. 


건축물 하나가 완성된 예술품이며 건물 내에 전시된 치파오는 옷 자체에서 관능미를 느끼게 한다. 

치파오 앞에서 자위를 한들 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므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헤리티지 1881 앞에 위치한 상하이 탕 건물


건물 주변에 핀 붉은 꽃잎이 흐린 하늘을 향해 입술을 열고 있다.  

해리티지 1881은 돌과 돌이 이어져 박음질을 한 듯한 정교함과 현대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홍콩 침사추이의 현대식 고층 건물 속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광장 초입에는 낮은 높이로 뛰어오르는 분수대와 하트와 원형 모양의 화사한 풍선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1층에 위치한 명품 숍을 시작으로 각 층마다 고급 레스토랑들이 포진해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들이 잘 단장돼 있다.

헤리티지 1881의 아름다움은 한낮에서 밤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회색빛 대리석들은 부분 조명을 받아 황금색으로 꽃단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왕을 맞는 황후의 섹시한 잠옷처럼 보였다. 


광장의 분수는 푸른빛을 뛰며 하늘로 치솟는다.  헤리티지 뒤편에 있는 고층빌딩들도 마치 한 몸인양 유리창 밖으로 빛을 던진다. 

낮보다 밤에 더욱 빛나는 Hetitage 1881 건물


대리석 계단을 왕처럼 천천히 밟고 올라서자 이쁜 카페와 야외 테라스가 보였다. 

일순 잠잠했던 배고픔이 아랫도리에서 밀려왔다. 참을 수 없는 허기였다. 

나는 간단히 요기할 만한 메뉴를 탐색하기 위해 출입문 앞의 메뉴판을 위에서 아래까지 보았지만 모두 낯선 이름들 뿐이다. 더구나 이 화려한 카페에서 혼자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강력한 식욕감퇴제이다.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할 수 있었으면... 

카페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내적 갈등에 빠져 있는 순간 어디선가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중국말처럼 들렸지만 점차 한국말로 들렸다.

청바지와 체크 모양의 커플 티를 입은 청춘 남녀이다. 외국에서 배고픈 것도 서러운데 젊은것들이 온갖 교태를 다 부리고 있는 모양을 보고 있으니 서글픈 분노가 일어났다. 

나는 증오의 눈초리로 그들을 지켜봤다. 

남자는 가방에서 짧은 펼침막을 꺼내더니 쏜살같이 계단을 밟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나랑 결혼해 줄래'라는 붉은색 펼침막을 펼쳤다. 


여자는 확답을 하지 않은 채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자신에 대한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먼 훗날 애정 파산을 대비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명품 브랜드 숍과 스위트 룸 호텔, 고급 레스토랑이 입주한 헤리티지 1881


남자는 이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다양한 각도에서 포즈를 취한다.

여자는 까르륵 웃고 폴짝 폴짝 뛴다. 남자의 프러포즈는 깜짝성 이벤트가 아니라 다분히 두 사람 사이에 이미 합의된 각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다지 감동이 없고 유치해 보인다. 

그들은 이곳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각자 한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다양한 술수와 달콤한 밀어들을 무책임하게 쏟아부으며 첫 키스에 성공했을 것이며 그로부터 그 나머지의 몸도 허락했을 것이다. 


영원할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 모든 환희를 터뜨리는 그들. 

부럽기보다 이 먼 홍콩까지 와서 감동 없는 연출을 일삼는 그들이 유치해 보인다. 

나는 항상 혼자 떠난 여행이었고 내 안의 모든 감각을 확인하는 밀월여행이었다.

낯익은 나를 낯선 나에게로 떠나는 진짜 여행 말이다.

맨 위층으로 올라가자 멀리 빅토리아만을 향해 조준된 대포들이 보였다. 

이 아름다운 석조 건물에 흉악스러운 쇠 덩어리 화포가 있다니.  

예전 해양 경찰청 건물이었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홍콩인들의 지혜로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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