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홍콩, Mid-Levels Escalator

- 중완역 근처의 마천루와 문무양도의 만모 사원


눈을 떴다. 높은 천장. 새하얀 이불. 다소 추운 느낌이 든다. 



온기가 없는 호텔방. 허기진 배는 알람시계보다 정확하다. 아침 7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머릿속에서 여정을 그려본다. 방향은 있지만 목적지가 없는 지도. 

나는 오늘도 걷고 걸을 것이다. 

커튼을 걷고 창 밖을 보자 역시 흐린 날씨이다. 

까마득한 도로 밑에 트램이 지나가고 성완 주민들의 바쁜 일상이 시작되고 있다.

아침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트램에 올랐다. 

어린 날 가장행렬을 꾸민 것 같은 거대한 트램이 연이어 달린다.

도로 중앙을 관통한 트램 궤도와 길가의 풍경을 이룬 소품들



케네디 타운에서 출발한 트램은 특유의 바퀴소리를 내며 달렸다.

나는 홍콩 은행 타워 뒷면이 보이자 길가에서 내렸다. 그리고 센트럴 역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단지 하루만 보냈을 뿐인데 더 이상 홍콩은 낯설지 않다.

어쩜 나는 여행자로서 적합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그 낯선 세계와 동화될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나는 여유롭게 건물 벽면에 부착된 포스터를 보기도 하고 길거리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 보기도 한다.

공원 한쪽에서는 태극권을 연무하는 노인들과 전철역 근처에서 여성들이 무가지 잡지를 배포하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물건을 운반하는 아저씨. 어딜 가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기쁨과 고통도 보편적일 것이다.



몇 걸음 옮기자 헐렁해진 아랫배에서 배고픔이 몰려왔다. 전철역 안으로 들어가 빵과 생수를 하나 샀다. 

출근하는 홍콩인들의 뒷덜미를 보며 빵을 씹어 먹었다. 조금 외로움이 몰려왔다.

홍콩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몇 번 생소한 음식에 도전해봤지만 절반 이상을 먹지 못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느끼함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고기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국수류들. 진한 향신료는 후각을 마비시켜 미각을 떨어뜨렸다.

어제 밤늦게 호텔 근처에서 먹었던 정체불명의 음식이 떠올랐다. 절반도 먹지 못한 음식.

빵은 특별히 입맛과 관계없는 음식이다. 그냥 배만 채울 뿐이다. 다시 전철을 탔다. 


전철역에서 나오자 젊은 남성의 성기 같은 울퉁불퉁한 건물이 여기저기 발기해 있다.

머리를 들어 빌딩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홍콩 중국 은행 건물과 Lippo, IFC 건물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햇빛은 구름 사이에 파묻힌 채 Lippo건물의 유리창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홍콩의 길은 단지 인도와 건널목으로만 구성돼 있지 않았다. 걸음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건물 내부로 이어지고 맞은편 인도로 이동할 수 있도록 연결돼 있었다. 무척 걷기 편리하다.


이날은 운수가 좋은 날이었는지 Lippo건물 로비에서 사자탈춤 놀이를 구경하게 되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은 한 기업의 발전을 기원하는 행사 같았다. 장대 높은 곳에 올라간 두 마리 사자는 장쾌한 북소리에 맞춰 온갖 묘기를 다 부리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치장한 사자탈은 그 모양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였다.

떠들썩한 북소리와 사자 두 마리를 남겨두고 건물과 건물이 연결된 육교를 건너자 열대 야자수 나무와 푸르고 푸른 물이 흘러넘치는 공원이 등장했다. '황후산' 공원이다.

건물의 숲과 공원의 숲이 만나 도심의 오아시스를 형성하고 있다. 

꽃과 꽃 사이에 예전 영국 총독부 건물이 보인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나는 공원 주변을 서성거렸다. 공원 내에서 두 여인이 마주 보고 책을 읽고 있었다. 

꽃밭 속의 한 여인은 화단을 다듬고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총독부 앞에 설치된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갔는지 동상은 온 데 간데없고 빈 받침대만 남아 있다.

그 뒷면에는 매끈한 성기를 닮은 ifc빌딩이 보인다. 다시 센트럴 역으로 이동하여 미드 레벨로 찾아가야 한다.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두리번두리번거리며 도로 표지판을 주시한다. 폭이 좁은 도로, 높은 빌딩은 입체적이다.

미드 레벨 표지판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작은 육교 하나 가 나타났다. 몇 걸음 오르자 녹색 바탕에 中이라는 글자가 박혀있다. 800미터의 미들 레벨의 시작이다. 
1994년 개통된 세계 최장의 에스컬레이터 미드 레벨. 그리고 주변의 풍경


미들레벨은 직선방향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진 형태가 아니라 사방으로 출구가 이어져 있기 때문에 소호 풍경은 물론 홍콩 골목의 뒷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작고 소담스러운 카페들이 옹기종기 소꿉놀이하듯 경사지를 따라 배치돼 있고 아직 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맥주잔을 기울이는 여유로운 이방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 또한 한 잔의 시원한 맥주가 그리웠다. 

무작정 카페 안으로 들어가 호기롭게 웨이터를 부르고 싶지만 섣불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미들레벨 라인을 따라 이어진 아기자기한 shop들은 우리의 가로수길이나 홍대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외국인의 잦은 출몰과 이색적인 소품들. 그리고 낯선 지역에 느끼는 생소함과 호기심이라고 할까.


나는 좌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미드레벨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 다시 계단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며 눈여겨보는 다양한 샵들은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다리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습한 날씨와 함께 몸은 달아올랐다.

나는 주변 계단에 주저앉아 맥주캔 하나를 단숨에 비웠다. 갈증이 가라앉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주변은 유럽적인 카페 문화와 홍콩의 전통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있는 특이한 지역이다.  

내 눈 앞에는 과일가게가 있고 그 옆은 '주윤발'이 다녀갔다는 허름한 중국 특유의 음식점이 있다. 

그리고 채소가게가 있다. 몇 집 건너편에는 아담한 유럽식 카페가 있다.

나는 사과 하나를 입에 물고 어슬렁 홍콩 전통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각가지 꽃들이 다양한 색상들로 화단을 이루었고 정육점에는 난도질당한 붉은 고기 덩어리가 쇠꼬챙이에 걸려 있다.



센트럴 지역에서 셩완 방향으로 이동하자 먹거리의 잔치이다. 

찬거리를 사러 나온 주부들. 그리고 흥정에 여념이 없는 장사꾼들. 비로소 홍콩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쑨원기념관 주변에서 웨딩촬영에 여념 없는 신혼부부와 이를 부러운 듯 훔쳐보는 여고생들의 발랄함도 보인다. 이 지역은 중국 전통 공예품들이 즐비하다. 다양한 부처님의 모습, 여인의 허리보다 더 가냘프고 아름다운 허리를 자랑하는 다양한 항아리들. 각종 장신구들이 유리창에서 빛난다. 

딱히 목적지가 없는 걷기는 예상치 못한 풍경을 제공한다.

그때 그때의 직관과 호기심으로 찾아 나서는 여행은 새로운 맛을 준다. 그래서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나는 할리우드 로드를 걸어갔다.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도교 사원. 학문의 신과 전재의 신을 모신 곳이다.


나는 그곳이 '만모사원'인지 몰랐다. 길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길래 무슨 일인가 했다. 

고층 빌딩에 비해 한없이 낮은 파란 지붕이 보였고 그 용마루에는 다양한 물상들이 빅토리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만모사원 안으로 들어섰다. 


일순간 한낮의 햇빛은 완전히 소멸되고 붉게 타오르는 촛불과 짙은 향 내음만이 진동했다. 속의 세계에서 영의 경계로 들어서는 듯했다.


무신 관우와 문신 문창제를 모시는 만모사원.  황금빛 향로에는 각자의 소원을 비는 향불이 타오르고 지붕에는 나선형의 향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간혹 한낮의 햇빛이 양철지붕 사이로 비치고 있었다.

향과 촛불은 소망의 간절함이다. 세상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생로병사의 굴레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속인들의 마음은 매 마찬가지이다.

나는 다시 센트럴 역으로 이동하여 스타페리 선착장에서 다시 배를 타고 구룡반도로 넘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녁 8시, 홍콩 섬의 Show Tim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