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녹였던 사람들
#1.
친구와 기분 좋은 밤산책을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사는 빌라 현관문을 열며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보아하니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집에 들어가려던 한 남자와 동선이 묘하게 겹쳤던 것.
사실 자취 생활 5년여 동안 좀처럼 이웃과 안면을 트는 일이 없었다.
집 앞 편의점도 괜스레 단골로 비칠까 봐 웬만하면 이용하지 않았다.
'내가 이 동네에 사는 걸, 이웃들이 모르게 할 것'
이는 혼자 사는 30대 여자로서 마주하게 되는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이런 내가 낯선 남자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스마트폰에 코 박고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내 맘을 눈치챈 것일까? 그 남자는 곧바로 계단을 택했다. 내심 고마웠다. 그 사람보다는 그 상황이.
땡!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고 경쾌하게 울리던 순간ㅡ현관문 유리창 너머에 내가 몇 달 전부터 눈에 밟혀하던 길냥이 한 마리가 아주 예쁜 자태로 식빵을 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마음 급한 출근 길도 아니고, 몸과 마음이 지친 퇴근 길도 아닌 주말, 그것도 토요일 밤 아닌가?
쭈그리고 앉아 야옹 거리는 녀석에게 맞장구를 치며 얼마간 놀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 갔던 순간, 뒤에서 땡!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소리였다.
길냥이들에게 틈틈이 통조림을 챙겨 주면서도 난 최대한 인적이 드문 때와 장소를 골랐다.
혹시라도 이들에 대한 나의 호의가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주고, 그게 녀석들을 해코지하는 방법으로 영향을 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이 녀석들을 예뻐한다는 걸 누군가 안다면, 좋을 게 없다 생각했다.
긴장됐다. 내 뒷모습을 본 누군가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면 어쩌지. 별의별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를 안심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얘네 예쁘죠?"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 그는 왼손에는 위생장갑, 오른손에는 통조림 통을 들고 있었다.
일순간 내 마음은 활짝 열렸다. 반가운 마음에 "네! 너~무 귀여워요"라며 대꾸했다.
그 사람도 반가웠던지 한참을 이 녀석들에게 물과 사료를 주는 장소, 동네 캣맘, 고양이들의 건강상태 등에 대해 늘어놓았다. 보아하니 담배 한 대씩 태우며 고양이들 몇몇과 안면을 트며 몇 개월간 밥을 챙겨주던 '캣파'였다. 몇 분 전,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몹시도 괴롭혔던 남자, 알고 보니 동물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2.
새로 옮긴 직장에서의 첫 회식.
인원수 제한으로 나, 여자 과장 1, 여자 과장 2, 상무님, 이렇게 4명이서 조촐한 환영식이 이루어졌다.
오전 내내 오던 눈이 오후에는 그야말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온 지 얼마 안 된 신참 경력직 직원과 상무님과 함께 하는 회식자리가 여자 과장 1,2는 얼마나 내키지 않았을지 알만했다. 상무님이 자리에 없을 때, 둘은 "아, 취소될 뻔했는데! 왜 눈이 이렇게 녹았어~~~"라며 회식이 취소되지 않게 만든 하늘을 원망했다.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여자 과장 1은 내 옆자리에 앉아 나를 꽤 살뜰히 챙겨줬고, 여자 과장 2는 조금 새침해 보였다.
회사를 옮기며 가장 걱정한 건, 사람들의 텃세였다.
(나는 격무보다 힘든 건, 안 맞는 사람들이라 믿는, 관계 중싱적 사회인이다)
겨우 출근 7일 차, 그 둘의 캐릭터를 가늠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 멤버들과 회식이 시작됐다.
장소는 삼겹살 집. 소맥 몇 잔이 들어가니, 여자 1과 2의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회식 취소를 염원하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상무님~ 이런 자리 자주 마련해주세요~~"라며 진심일까, 빈말일까 싶은 말을 해댔다.
대기업 미생인 나는 그들의 진심을 알 수 없었다.
6시 반부터 8시 반까지. 2시간 동안 그 둘의 사회생활을 관람하고 나는 속으로
'아, 이게 진정한 사회생활인가? 그동안 나는 편하게 사회생활을 한 거구나'라고 되뇌었다.
취기 하나도 오르지 않은 주당인 상무는 자리가 파할 때쯤 대리운전을 불렀다.
눈이 많이 와서였는지, 기사가 좀처럼 오지 않자 상무는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 대기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쩔 줄 몰라하던 과장 1과 나 사이에서 과장 2는 팔짱을 끼며 "가자!! 우린!"라며 채근했다.
"어? 그래도 되나?"라며 하릴없이 우리는 그녀를 따라갔다.
어안이 벙벙한 내 표정을 보자, 과장 2는
"놀랐죠? 나, 이중인격자예요!"
라며 내뱉었다. 뭔가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순간 푸핰핰 웃음이 나왔다.
내내 경계 어린 눈초리로 그 둘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지켜봤던 나의 눈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뀌었다. 그 말을 하는 과장 2의 표정과 말투가 사회생활 이골이 난 사촌언니 같았다. 친근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봤던 내 시선을 충분히 의식하고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3.
스물여섯, 본격적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때.
나와 같이 입사한 동기A는 나와 대학 동문이지만 나보다 2살이 많았다. 문근영처럼 동그란 눈에, 까만 단발머리의 A는 어쩐지 차갑게 느껴졌다. 말 걸기가 어려웠는데, 그건 아마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던 우리가 무장해제되던 순간은, 갑자기 등장한 복슬복슬 흰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 덕분이었다.
사무실에 고양이가 있어도 되나? 누구 고양이지? 따위의 질문은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며 해도 될 것들이었다.
나보다 더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A였다. 쓰다듬는 것도 모자라 안아보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출장 간 팀 선배가 애지중지 키우는 고양이 알렉스였다.
편집장이 잠시 맡아주다, 오늘 선배가 출장에서 돌아와 데리고 갈 거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고양이를 실물로 보기엔 흔치 않았는데, 알렉스는 정말 너무 순하고 우아한 고양이었다. 처음 보는 우리에게도 낯가림 없이 푹 잘 안겼으니까.
A는 고양이에게 의자 반을 내주며 함께 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어머! A야, 바지에 털이..."
A는 검은색 모직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알렉스의 털이 하얗다는 걸 깜빡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바지에는 온통 앙고라처럼 부드럽고 가느다란 알렉스의 털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분주하게 떼어내는 듯하더니, 불쑥 A는 내 자리로 와 나에게 테이프를 쥐어주었다.
"좀 떼 줄 수 있어요?"
그리고는 A의 손이 닿지 않은 엉덩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정말 A가 만족할 만큼 잘 떼어 주고 싶었다. 그녀가 반나절 내내 털이 있는 동물과 함께 있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할 만큼 감쪽같이.
토실토실한 A의 엉덩이에 붙어 있는 털을 떼어내며, 그녀의 신뢰에 나는 응당 보답하고 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를 믿고 수술대에 올라간 나약한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마음이었다.
난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또한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을 썩 믿지 못한다.
그 다정함과 친절함이 모두에게 통한다 해도, 나에겐 통하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반발심 때문이기도 하고, 그 근간에는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의심 때문이기도 하다.
닫힌 마음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내 마음을 너무 쉽게 열면, 내가 그렇듯 상대도 나를 그렇게 보지 않을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마음은 철통 문이 아니다.
손가락 살짝만 흔들거나, 움직이는 시늉만 해도 센서가 인식해 쉽게 열리는 자동문 같다.
(물론 한번 고장 나면 좀처럼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지만)
상대는 의식조차 하지 못한 순간에, 내 마음 문의 센서가 작동해 열리곤 한다.
탁! 하며 마음의 문이 열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나의 관계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