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이모를 기억하기

신혼여행을 다녀와 큰 이모가 돌아가신 걸 알았다

by 집필앤하이드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은 명절.

많은 사람들이 결혼한 걸 가장 크게 실감하는 시기라고 하는데, 나는 시댁의 배려로 내리 연휴를 쉬게 됐다. 집과 가까운 친정인 수원에만 다녀오고, 명절 세리머니는 갈음하는 것으로 남편과 의견을 모았다.

추석 당일, 1시간 남짓 달려간 수원에서 나는 여느 때처럼 결혼식 이후에 다녀온 시댁 이야기, 친한 친구들의 근황 등을 유쾌하게 얘기했다.

때론 슬픔이든 기쁨이든어떤 감정은 감추거나 누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엄마에겐 그 어떤 순간이 그랬던 것 같다.

“첫째 이모가 돌아가셨어”

엄마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 치우고 설거지를 하려던 찰나, 엄마는 감정이 복받쳤던 모양이다. 그 한마디를 하고 식탁 의자에 주저앉아서 말을 잇지 못하다 놀란 내가 줄줄이 질문을 해대자 그제야 엄마는 대답을 이어갔다.

열흘 전쯤 갑자기 수술대에 오른 이모가 예상보다 긴 수술시간을 못 견디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몇 해전부터 심근경색으로 고생 중이던 이모는 점차 상태가 호전되는 듯 보였고, 비록 입맛이 없어 음식을 잘 드시지는 못해도 통화도 하고, 곧 있을 내 결혼식을 기대하셨다고 했다. 엄마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씩씩하게 통화했던 이모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황망하고 슬프다고 했다. 자주 보지는 못해도 형제란, 존재만으로 그 역할을 다한다. 그러니 그런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상실감이 클 것이 명백했다.

엄마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이모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연락하지’아쉬움은 컸지만 나를 향한 엄마의 배려라 여겼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언니가 셋, 남동생이 하나 있다. 그중 맏이인 첫째 이모는 체구도 작고 얼굴도 손바닥만큼 작았다. 형제 중 유일하게 안경을 쓰셨다. 이모에게도 네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딸이 셋, 막내아들이 하나였다. 셋째 딸만큼은 아들이라 생각했는데,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출산하자마자 눈물을 쏟아내는 바람에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했다. 아들을 원한 건 이모의 시댁이었다. 딸만 셋을 낳아 구박받던 이모에게 막내아들은 천금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막내아들은 나보다 겨우 한 살이 어렸는데도 내 눈엔 어린애처럼 보였다. 나이차 많이 나는 누나들 사이에서, 그리고 아들이라고 하면 애지중지하는 이모와 이모부 사이에서 자란 어리광 많은 막내아들 그 자체였다. 이모는 늘 “우리 원석이”를 입에 달고 다녔다. 이쯤 되면 남아선호사상에 젖은 사람이고, 딸인 나보다는 아들인 오빠에게 더 애정을 가질 법했지만 이모는 딱히 우리를

차별하진 않았다. 이모는 나를 그저 막내 여동생의 자식으로 동등하게 대하셨던 것 같다.

이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늘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올 만큼 바삐 살았기에 이모와 함께 밥을 먹는 건 어려웠다. 나는 방학 때마다 종종 외가댁이나 이모댁에 일주일 씩 놀러 가 있고는 했는데, 어쩌다 이모와 밥을 먹을 때 항상 식전 기도를 했다. 이모는 작게 읊조리며 기도를 하셨는데 그 모습은 볼 때마다 진지하고, 신실해 보였다. 이모의 뜻과 달리 사촌 언니들은 교회를 잘 다니지 않았다. 이모가 그렇게 이뻐하는 원석이마저도 교회 열심히 다니는 친구 한 둘이 일요일 아침마다 불러내야 겨우 억지로 끌려가듯 갔다.

이모는 작은 체구와 달리 말투나 목소리가 꽤 씩씩하고 털털했다. 이모부는 당시 정육점을 운영했는데 그 옆에서 이모는 빨간 고깃덩어리를 기나긴 칼로 능숙하게 자르고, 정육점이 있던 시장 어귀의 주변 상인들과도 잘 지냈다. 정육점에서는 국수도 팔았는데 포장이 그렇게 꼼꼼하지 않아 슬쩍 생국수 한 가락을 뽑아 먹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오도독 씹히는 맛과 짭짤하게 간이 된 밀가루 반죽인 국수 한 가락이 내 입맛엔 꽤 잘 맞았다. 내가 그렇게 국수를 뽑아 먹을 때도 이모는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다.

나는 이모의 딸 중 막내딸인 은영언니를 무척 좋아했다. 아마도 다른 언니들보다 나이차가(그나마) 덜 나고, 어른들이 입을 모아 은영언니를 칭찬하는 탓에 나는 더 언니를 따랐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자신보다 무려 5살이나 어린 나를 곧잘 챙겨주고 어디든 데리고 가려했던 언니는 어른들 말처럼 정말로 어른스럽고,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모는 그걸 알면서도 유난히 은영언니를 나무라는 일이 많았다. 아마도 동생들의 못마땅한 모습을 바로 혼내긴 어려워 언니를 쿠션 삼아 혼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언니에게 너무 미안하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이모부는 이모와 언니들에게 잔소리를 자주 했다. 이모는 그런 이모부를 영 마뜩지 않아했다. 구체적인 상황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는 종종 이모부가 사내답지 않게 그릇이 크지 않다며 대놓고 이모에게 흉을 보곤 했다. 이모는 그런 엄마의 말을 맞장구치며 크게 웃곤 했다.

어린 내 눈에 봐도 엄마의 형제 중 첫째 이모는 가장 먼저 출가 해 가장 많이 고생하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사촌 언니들은 일찍이 제 짝을 찾아 결혼했고, 이모의 한을 대신 풀어주는 건지, 사촠 언니들은 줄줄이 아들을 낳았고, 은영언니만 아들, 딸 고루 낳았다. 이모가 살던 동네는 재개발이 됐고, 이모는 손주들을 봐주기 위해 언니들의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어떤 날은 김포에, 어떤 날은 의왕에, 어떤 날은 진천에…. 자녀들의 결혼이 늦었던 엄마를 제외하고 모든 이모들은 손주를 봐주느라 바빴다. 그중에서도 자녀가 많은 첫째 이모는 가장 오랜 시간 손주를 봐주는데 시간과 체력을 써야 했다.

엄마는 일찍이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애 못 봐”라고 선전 포고했다. 육아하느라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이모들을 보며 엄마가 내린 결론이었던 것 같았다. 이모는 30대 후반이 훌쩍 넘어가는 막내 동생의 아들, 딸에게 결혼의 소식이 없어 대신 초조했던 것 같다.


마침내 내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엄마를 축하했고, 결혼 전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소영이 결혼식 00일 남았네~”라며 대신 설레하셨다고 했다. 내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사러 백화점에도 가셨다고도 했다. 물론 그 백화점에서 이모가 길을 잃어 경찰까지 부르는 난리가 나는 바람에 그 마저도 무산이 됐지만.


결혼식에 이모는 오지 않았다. 대신 은영언니가 언니 키만큼 큰 아이들, 그리고 형부와 함께 왔다. 몇 십년만에 재회였다. 쑥스럽게 웃으며 언니는 “우리 가족 대표로 왔어” 라며 축하해줬다.

내심 이모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신 건가 염려됐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 같다. 어른들이 무리하면서 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까지는 난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난 이모가 내 결혼을 그렇게 걱정하고, 기대하는지도 몰랐다.

모두 슬픔에 복 받친 엄마가 전해주신 얘기다.


그런 이모가 돌아가셨다.

4월쯤 이모가 직접 엄마가 사는 수원에 놀러 오셨다고 했다. 체력이 약해진 이모를 보기 위해 엄마나 다른 이모들이 찾아가는 일은 있어도, 몸소 집에 오시는 건 드문 일이라 의아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그 시간을 기쁘고, 충실하게 보냈다. 간단히 산책하고, 집에서 밥을 차려드렸는데 맛있게 드신 이모가 거실 소파에 잠시 누워 연신 이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너무 좋다. 너무 좋아~”

항상 먼저 전화를 하는 이모는 엄마가 스스로의 무심함을 자책하듯 말하면 “누가 하면 어때~”라고 대꾸하고, 어쩌다 엄마의 전화를 받을 때면 “너니~?”라며 다정하게 답했다고 했다.

엄마는 첫째 이모의 그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 맴돈다고 했다.

신실하고 선량한 이모의 모습이 엄마가 흉내 내는 이모의 목소리와 연상 돼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모에겐 막내 동생인 엄마지만, 예순이 넘은 엄마가 그로 인해 마음 아파 기운까지 빠질까 봐 겁이 났다. 엄마의 눈물에 내 눈물을 더하긴 싫었다.


몇 번 가보진 않았지만 장례식장에서는 웃고 떠드는 게 예의라고 들었다. 슬픔이 가득한 빈소에서 그게 가능한 일이냐,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이모와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들을 지껄였다.

언젠가 외갓집에서 윷놀이를 했는데, 나의 친오빠와 큰 이모가 같은 편이 돼 윷 판에 말을 어떻게 놓느냐 가지고 언쟁이 붙었던 날이 불쑥 생각났다.

K장녀와 K장남의 세대를 넘는 대결이었다.

아들이라고 하면 끔뻑 죽는 이모도 그때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두 사람의 대결은 오빠의 눈물과 이모의 민망함으로 끝났던 것 같다.

마지막까지 이모를 모시고 살았던 이모의 첫째 딸은

엄마 따라 기독교 신자로 살고 있다. 장례식장에 갔던 오빠는 누나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모는 분명 천국에 갔을 거라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전에 이모에게 해드릴 수 있는 호사는 언니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치로 해드렸기에 자식으로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오빠의 장례식담(?) 덕분에 분위기는 조금 전환됐다.

모르긴 몰라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모가 천국에 가기에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모가 언젠가 수원 집 거실 소파에 누워서 느꼈던 편안함처럼, 천국 어딘가에서도 누리시길 바란다. 그게 꼭 이모가 생전에 굳게 믿었던 하나님의 곁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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